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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수라 백작    
글쓴이 : 장석창    23-06-06 21:31    조회 : 2,258

아수라 백작

  

  간밤에 비가 왔는지 죽은 지렁이들이 널브러져 있다. 바쁜 출근길임에도 지나치지 못한다. 비가 오면 지렁이는 흙 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다. 새로운 땅을 찾아 보도블록 위를 활개 치지만, 길을 잃은 지렁이는 해가 뜨면 말라 죽는다. 지렁이의 꿈은 한결같다. 마음껏 숨 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지렁이의 삶은 어둠과 은둔이다. 문득 떠오른 그들 몸의 특징이 한 젊은이를 돌아보게 한다. ‘암수한몸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았으면 하는데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기로 가득했던 2018년 늦가을 어느 날, 감색 트렌치코트 차림의 청년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남성의 목소리치고는 가늘었지만, 힘이 있었다. 아담한 키에 날렵한 몸매였다. 단발머리 밑으로 드러난 해말간 피부가 눈부셨다. 커다란 검정 선글라스에 가려진 자그만 얼굴은 생김새에 궁금증을 자아냈고, 갸름한 턱에서 흘러내린 목선이 유려했다.

  ‘참 예쁘게 생긴 청년이네. 젊은 나이에 왜 남성 호르몬 보충요법을 원하지?’

컴퓨터에서 접수 창을 열었다. 이름은 남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한글 이름이다. 나이를 가늠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살폈다. 이십 대 중반이다. 그런데, 뒷자리가 ‘2’로 시작한다. 이럴 수가! 여자라니.


  S는 자리에 앉더니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가녀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봉투 안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어 훑어보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발부한 진단서에는 '성전환증'이라는 병명이 적시되어 있었다. 그동안 모 대학병원에서 남성 호르몬 주사요법을 받은 진료기록부도 함께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3개월마다 남성 호르몬 주사를 놓아달라는 이야기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S의 표정을 살폈다. 수줍은 듯 당당함, S에게는 이중성이 있었다. 진료실을 나서는 S의 뒷모습을 보았다. 트렌치코트가 휘날리며 일으킨 공기의 흐름은 애달픔이라는 파문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수라 백작은 추억의 만화영화 <마징가 Z>에 등장하는 양성(兩性) 인간이다. 아수라 백작 캐릭터는 독특하다. 얼굴과 몸의 반쪽은 남자이고, 다른 반쪽은 여자이다. 어떤 인물이나 현상에 상반된 양면성이 공존할 때, 흔히 아수라 백작에 비유하곤 한다. 생물학적 성과는 반대의 성 주체성을 가진 S를 보면서 아수라 백작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가족과 함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관람했다. 영국의 전설적 록밴드인 퀸(Queen)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리드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퀸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만들어진 뒷이야기를 알 수 있어 5060세대에게는 젊은 시절의 향수를, 신세대에게는 옛것에 대한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프레디의 성생활과 정신세계이다. 프레디는 양성애자(兩性愛子)이고 에이즈에 걸려 사망했다. 영원한 연인이었던 메리가 일하는 옷가게에서 골랐던 여성복, 이후 공연할 때 입었던 일련의 여성 의상들에서 그의 성적 정신세계를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디는 자신이 남성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타고난 자신의 성을 거부하는 S와는 대비된다. 의학적으로 양성애와 동성애는 성적 지향의 하나일 뿐, 정신질환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무대 옆에 나란히 서서 흐뭇한 표정으로 프레디를 지켜보는 남녀 연인, 짐 허튼과 메리 오스틴. 프레디야말로 진정한 아수라 백작인지도 모른다.

  역사상 이름을 남긴 인물들, 특히 철학과 예술 분야에서 그 면면을 살펴보면 성 소수자가 적지 않다. 기원전 5세기경의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 바이런, 슈베르트, 차이콥스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들이 양성애 혹은 동성애자였다. 나는 그들의 창의적 사고가 오롯이 천재성의 소산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그들 특유의 정신 체계에서만 인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발라드와 록에 오페라를 접목한 프레디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도 그 결과물이 아닐까.

 

  S는 카멜레온이었다. 어떤 날은 남성으로, 어떤 날은 여성으로 나타났다. 남성 차림일 때는 과묵하면서도 다소 공격적인 남성성을 드러냈다. 여성 차림일 때는 귀엽고 앙증맞으며, 아이돌 스타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는 또래의 아가씨였다. 이럴 때 S는 성전환증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가끔은 양성이 모두 나타나는 아수라 백작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S는 스스로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직장에 다니거나 지인을 만날 때는 여성으로 가장했고, 거리낌이 없어지면 자신이 원하는 남성으로 돌아갔다. 성 소수자의 비애이다.

  하루는 S가 작심한 듯 심경을 토로했다.

  “선생님은 저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시지요? 오늘은 왠지 말씀드리고 싶네요.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을 제외하면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저는 손이 귀한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어렵게 얻은 늦둥이인 제가 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라셨겠지요. 물론 그런 티는 전혀 내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눈치로 두 분의 서운함을 알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아빠가 공원에서 함께 노는 부자(父子)를 유심히 바라보시더군요. 저는 아직 어렸지만, 아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제가 생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것이. 아니, 혐오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요. 저는 생리 증후군도 없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과연 누구냐?’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지요. 마음속에 잠재된 본성을 알고 싶었어요.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기 시작하면서 생리가 끊기더군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좋아요. 이런 저를 부모님은 아직 모르세요. 언젠가는 저를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어느새 S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그날따라 S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S를 만난 지 막 3년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S의 목소리는 점점 굵어지고, 목젖이 도드라졌다.

  ‘전에 부모님이 아직 모르신다더니. 이제 눈치채고, 흔쾌히 인정해주셨나?’

  S가 들뜬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선생님, 우리가 이겼어요. 얼마 전에 항고심 판결이 났어요. 이제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고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도 고려해보려고요.”

  외성기의 형성 여부나 생식능력의 상실 및 재전환 가능성이 성별 정정의 허가기준에서 참고사항으로 변경되었음이 판결의 골자이다. 성 소수자의 인권을 한층 신장시킨 판결이다.

 

  성전환자 하리수가 떠오른다. 이십여 년 전, 홀연 대중매체 등장하여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하리수의 인기도 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경외와 혐오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보아야 할 게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당신은 왜 타고난 성을 받아들이고 이성을 사랑하는가?’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내가 이를 당연시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긴다. 누구에게나 사람답게 살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까.

  성 소수자는 벽장 속에서 살아간다. 성 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때, 커밍아웃한다고 한다. 이는 ‘Coming out of the closet(벽장 속에서 나오다)’에서 유래한다.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 벽장 속에 자주 숨는 것을 보면, 벽장은 은폐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적 마인드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의 편견과 멸시가 지속된다면, 그들은 영영 벽장 속에 숨으려 할 것이다.

  

  그날 보았던 S의 해맑은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문득, S가 마음속에 키우고 있던 유니콘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등에 올라타 유니콘과 함께 비상하여, 파란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 위를 달리며 힘껏 외치도록 말이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에세이문학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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