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김시현
fence2000@hanmail.net
6월인데도 오키나와는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마당이 있는 펜션이다. 낮은 담장 앞 들녘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바닷물이 산호초에 쏴~아 철~썩 쏴~아 철~썩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는 밤새도록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 코끼리 형상을 닮은 절벽인 만좌모万座毛에 도착했다. 만좌모는 류큐 왕이 절벽 위 넓은 들판을 보고 만 명도 앉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결을 따라 밀려온 파도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에 부딪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절벽 아래에서는 에메랄드빛 물이 유난히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멍에 빠져 있다가 협곡을 바라보니 아찔함이 일었다.
만좌모, 그곳을 떠나 오키나와 시내로 진입하던 중. 자동차 주유 게이지에 신호가 들어왔다. 동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도와 가까운 쪽으로 자동차를 세웠다. 초록불이 켜져 움직이려는데 자동차는 꿈쩍하지 않는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자동차로 몰려들었다. 근처 주유소 위치를 알려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핸드폰으로 주유소가 있는 곳의 방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보다는 뭐로 보나 박사 출신 동생이 나을 법도 하건만 나더러 다녀오란다. 정차해 있는 자동차를 보고 경찰이 올지도 모르니 운전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자동차를 길에 세워 두었다가 주차위반으로 걸릴 수도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낯선 길을 찾아 나섰다.
극한 상황에서 무슨 용기였는지 핸드폰이 알려 주는 방향을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혹시나 영어와 한글 자막이 쓰인 간판이라도 나오면 방향을 찾을 수 있으려나 싶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모르는 일본어뿐이다. 간판으로는 그 상점에서 뭘 파는지조차 분별하기 어려웠다. 핸드폰에서 알려 주는 방향으로 맞게 가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낯선 곳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사거리를 지나자 작은 도로가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주유소 가는 길이 맞는지 물어볼까 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가다 좌회전하고 신호를 받아 다시 길을 건너 걸어갔다. 1~2층으로 된 상가들이 드문드문 있다. 행인이 없는 거리는 조용하다. 긴장 탓인지 걸어서인지 땀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술래를 찾듯 기웃거리며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길을 걸었다. 조금 지나자 큰 도로가 나왔다. 건너편에 보이는 아담한 주유소를 보니 반가움에 긴장이 풀려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주유소에 도착하여 쌓여 있는 기름통을 가리키며 1통을 달라고 했다. 기름 1L와 기름통값을 계산했다. 중년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는 기름통을 반납해야 통값을 환불해 준다며 열심히 설명했다. 신기하게도 손짓·발짓으로 소통이 되었다.
주유소에 찾아갈 때는 멀다는 느낌보다 불안의 무게가 무거웠다. 자동차를 세워 둔 곳과 주유소는 1.5km 떨어진 거리였다. 돌아올 때는 1L 기름통을 들고 가는 일이 걱정이었다. 기름통이 무거워 몇 번이나 팔을 바꿔 가며 쉬었다. 선크림 바른 얼굴에 땀이 흘러내려 눈이 따가웠다. 동생에게 칭찬 한마디 들을 거라 기대했건만, 정작 자동차에 갇힌 동생은 내 걱정과 칭찬은 뒷전이었다. 머릿속에는 경찰이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더운 날 자동차에 갇혀 나를 기다린 동생이 더 고생했을 거 같아 미안했다. 기름통을 건네받은 동생은 주유기에 기름을 콸콸 부었다. 자동차는 밥을 먹어 배가 부른지 부르릉~ 붕~~~ 방귀 소리를 내었다.
시내를 벗어나 지옥에서 벗어난 기분을 만끽했다. 주유소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내 손에 들린 기름통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받아 정리했다. 나는 주유기를 가리키며 한국에서는 조심스러웠던 단어 “엔꼬”와 “만땅”을 외쳤다. “만땅”이라는 소리에 체기가 내려가듯 시원하고 개운하여 마음이 넉넉해진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이 일을 혼자 겪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 도리질을 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동생과 ‘함께’라면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해, 한국에는 미세 먼지가 한창이었다. 잠시나마 한국을 떠나 맑은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바람에 실려 오키나와 해변과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가을 하늘을 닮아 솜사탕 같았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것 같았다. 둘러보았던 관광지도 인상적이었지만 지금도 오키나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주유소 사건이다.
오키나와 여행에 대한 기억은 내게, 자동차 주유 램프에 깜빡이만 들어와도 주유소를 찾게 한다. 해마다 6월이 돌아오면 우리가 묵었던 숙소가 고향처럼 그립다. 벤치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곳. 파도 소리는 배경음악이 되어 바닷바람결에 떠밀려 왔다. 평안하고 아늑한 그리움이 있는 곳. 그곳에 마음이 머문다.
( 동인지 『산문로 7번가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