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무덤으로 통하는 널길을 따르는 관람객에게서 자못 긴장감이 느껴진다. 한 칸짜리 고분 속은 비좁고 깜깜했다. 다들 웅성웅성 두리번거린다. 바닥에 붙어있어 깊은 바다 동물의 발광기(發光器) 같은 조명등은 위쪽을 향하여 내쏘고 있었다. 그 빛을 가리지 않도록 모두 앉힌 다음 거의 엎드린 것처럼 자세를 낮추도록 했다. 그제야 천정과 네 벽면에서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오싹하는 신비한 기운이 엄습해오고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 <대륙의 꿈, 고구려>가 막을 열었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옛 고구려 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선지 연일 관람객이 넘쳤다. 하루에 두 번하는 정규해설을 듣기 위해서 수십여 명이 때맞춰 기다리다가 마이크를 에워싸며 물결을 이뤘다. 내가 맡은 해설시간에도 다음 전시물로 옮겨 갈 때마다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뚫고 앞장서 나가려면 “길 좀 터주세요.” 사정해야 할 정도였다. 도슨트로 활동한지 6년째인데 박물관이 그처럼 많은 관람객으로 들끓었던 적은 기억에 없다.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 그때 중국은 이민족들이 여기저기에 국가를 세우던 혼란기였고 고구려는 그 틈을 타 팽창정책을 폈다. 북으로는 내몽골, 서로는 요서(遼西), 동으로는 연해주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신라와 백제까지 영향력을 미치며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진정책이야말로 일본을 거쳐 태평양까지 진출하기 위한 야심찬 전략이었으니 시대를 뛰어 넘는 그의 웅대한 비전은 통쾌하다할만하다.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진파리(眞坡里)1호분’의 모형분도 설치되었다. 옛 벽화무덤을 속속들이 답사하는 것처럼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흙무지돌방무덤의 벽과 천장에 석회를 곱게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진파리1호분이다. 특히 바람에 날리는 오색구름과 꽃 보라, 휘날리는 두 그루의 소나무 그림이 유명한데 1,400여 년의 세월이 무색토록 현실감 나는 그 그림은 ‘우리나라 산수화의 시조’라는 평을 듣는다.
관람객을 이끌고 모형분 안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어디 있을까요?”
빙 둘러 살펴본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소나무가, 그 바람에 휘말린 구름들이 보인다. 구름 아래 백화가 난무하고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까지도 날아가는 듯하다. 천정 삼각고임대에 만발한 연꽃들도 사정없이 날린다. 과연 ‘고구려 벽화 중 가장 속도감 있는 바람의 그림’이란 또 하나의 평에 수긍이 가는 순간이었다.
고구려는 한민족인 예맥족(?貊族)으로 부여에 살던 주몽(朱蒙)이 BC37년에 세운 나라다. 아버지는 태양신 해모수(解慕漱)이고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은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이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이라는 천손(天孫)의식이 있다.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가 죽은 이를 현실세계에서 하늘세계로 이어주는 사다리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머리맡의 나무를 타고 무덤주인이 본향으로 올라간다는 기발한 발상이 흥미를 끈다. 원래는 그 소나무 그림 앞에 남녀의 관이 놓여있었다. 그려진 나무가 각 고분이 있는 지역에 흔한 나무라는 사실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평양시 역포구역 룡산리 진파리1호분의 무덤 입구는 양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니까.
중국과 북한에는 13,000여 기나 되는 고구려무덤이 있다. 그 중에서 평양과 집안(集安)지역을 중심으로 90여 기의 벽화무덤이 발굴 조사되어 세계문화유산에 <고구려 고분군>으로 등재도 되었다. 1,300년을 견딘 무덤 속 벽화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건축 기술과 잘 복원된 고구려 문화가 근거가 되어서였다. 우리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졌던 군사적 강국 고구려가 높은 문화의 나라였음을 재확인 해주는 증거이다.
고구려의 용맹한 철기부대가 때로 요하(遼河)를 건너 중국 북부 변경까지 위용을 떨쳤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내 가슴은 하늘까지 뛴다. 그런데 가슴 뛰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내 해설을 들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전을 관람했던 한 지인의 고백이다.
“지난 날 책상머리에서 배웠던 것들을 되돌려 보는 정도 아니겠냐고 그저 쉽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날 이후 내내 말을 잊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라는 단어 속에 담긴 그 깊고 무거운 의미들. 다만 고분 벽화 몇 점을 봤을 뿐인데도 가슴이 울렁이고 진도 빠진 걸 보면... 사온 도록을 펼쳐 막 강서중묘(江西中墓)의 널방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경이롭습니다.”
그렇다. 이득도 없는 박물관 도슨트 노릇이 내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밤을 새며 우리 역사를 알아갈수록 나를 더 그 일에 미치게 하는 매력이 바로 ‘두렵고 경이롭다’는 거다. 이런 나에게 국수주의에 빠졌다는 이도 있긴 하다.
진파리 1호분의 벽화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고분에 표현된 사신은 각각 한 벽면의 유일한 제재이며, 동ㆍ서ㆍ남ㆍ북 네 방향의 방위신이자 무덤주인의 수호신이다. 영광의 시대에는 고구려의 저력과 용맹을 분출했을 사신들이 지금은 퇴색되고 박락(剝落)되어 그 빛을 일어가며 어렴풋한 존재로 남아있었다. 북벽 흩날리는 두 소나무 밑 회벽이 희끗희끗 떨어져나간 사이로 현무(玄武)가 꿈틀 꿈틀대고 있다. 상상력 내지 무한한 표현력으로 하늘 선계(仙界)의 영기(靈氣)까지 그려낸 그들의 솜씨가 아니던가.
벽화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많이 훼손되었는데 원인은 습기와 관리 소홀이다. 동벽의 청룡(靑龍)과 서벽의 백호(白虎). 그들의 형편은 더 심해 보는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 앞에 선 관객들은 어느 것이 용이고 호랑인지조차 구별키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그저 보다 세심한 관리를 북한당국에게 바랄뿐 모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만 동동거렸다.
인상 깊기로는 안악3호분의 생활풍속도를 빼놓을 수 없다. 두 여인이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는 방앗간 그림에는 한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아 공이를 올린 사이에 다른 이는 둥근 돌확에 곡식을 넣고 있었다. 또 활활 불 지펴진 아궁이 위에 시루모양의 큰 동이를 얹은 채 한 여자가 국자로 김이 오르는 동이 속을 저으며 조리하는 부엌 앞에는 강아지 두 마리가 촐랑대고 있다. 그 친근한 벽화들은 어느 역사책보다도 더 생생하고 현장감 넘치는 고구려인의 ‘삶의 보고서’였다.
요즘 북핵문제를 놓고 한반도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역사를 바로 앎은 북한은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과의 외교전에서 우리나라가 당당히 미래를 개척하는 그 밑거름을 주는 일이다. 박물관에 몰려든 인파, 그것은 곧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중국에게 자극받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자하는 열망의 실체였다.
열망하는 가슴마다 자랑스레 새겨졌을 ‘고구려의 거대한 꿈’이, 저 중국 대륙을 향하여 말달리던 고구려의 용맹이 세계를 향하여 큰 꿈을 펼칠 우리 모두에게 박차를 가할 힘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책과 인생》2009년 9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