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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란    
글쓴이 : 김명희    23-12-28 22:14    조회 : 2,532

 

겨울이란

 

                                                                                김명희

 

 바람이 유독 차다 하는 마음이 들 때 쯤 겨울이 시작된다. 부산의 겨울은 눈이 거의 없고 물이 어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차고 거세진다. 그래서 다들 목을 감싸고 싶어지거나 몸을 자꾸만 꽁꽁 싸게 되면 ‘이제 겨울이구나!’ 했다. 책에서 본, 눈이 덮인 지붕이나, 골목에서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얼어붙은 도랑에서 썰매를 타는 모습들은 언제나 낯설었다. 눈의 무게에 지쳐 늘어져 힘겨운 나무들, 햇볕에 반짝이는 창가의 고드름, 교실에서 난로를 피워 도시락을 데워 먹는 풍경, 그런 모든 이야기가 신기했다.

 눈이 보여야 겨울이라 생각했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겨울 풍경은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온 이후의 것이 많다.

 처음 겨울을 느낀 건 신혼집 부엌 창으로 올려다 본 흰 눈이다. 회사가 멀어 일찍 나가는 남편의 식사를 차리기 위해 주방에 서면 꼭 먼저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아직 어둑한 작은 창으로 뒷집의 시멘트벽과 골목에 접한 작은 쪽문으로 오르는 네 칸 계단이 보였다. 온통 짙은 회색이었다. 일찍 남편이 출근하면 혼자 있게 되니 문을 꽁꽁 잠그는 게 습관이 되었다. 사방이 막힌 집에서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것은 부엌 창이 유일했다. 볕이 한줌 잠깐 들었다가 사라지는 반지하 집에서 부엌 창은 나의 숨구멍이었다. 가끔 호흡이 막히는 느낌이 들면 싱크대 앞에 서서 창을 열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식탁에 앉아 책을 읽다가도 일어서서 창밖의 햇살을 잠깐 내다보고 다시 앉아 책을 읽곤 했다. 나갈 일도 만날 사람도 없는 나의 찰나의 외출이었다.

 겨울이 되고 어느 날 아침 습관처럼 창을 열었다가 나는 소리를 질렀다. 계단 위와 벽의 돌 틈 사이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귀하게 보던 눈이라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시각 회색 벽과 검은 어둠을 눈이 하얗게 밀어내는 풍경이 나를 밝은 곳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눈은 겨우내 즐거움을 주었다. 창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작은 눈사람을 세워 두고 틈만 나면 내다보았다. 남편은 파주 지역에서 군대 생활을 했는데 겨울이면 눈 치우느라 너무 고생했다고 눈이 싫다 했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눈 타령을 잘 참아 주었고 나의 감흥에 적당히 호응도 했다..

 남편의 지방 근무를 따라갔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뒤 폭설이 온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방학이라 부산 할머니 댁에 갔는데 고속도로까지 막혀 일주일이 넘도록 집에 오지 못했다. 그동안 남편이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나면 온전한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다. 그림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봤던 겨울 풍경들을 그때 가장 많이 보았다. 아침 일찍 나가 쌓여있는 눈을 밟아 보기도 하고 차에 쌓인 눈 위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차도 잘 못 가는 길을 책을 넣은 배낭을 메고 도서관을 향해 눈밭을 헤치며 나아가 보기도 했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어진 도로 위에는 눈에 막혀 못 빠져나간 차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가끔 큰 차만 한두 대 다닐 뿐 사람도 차도 없이 눈만 쌓인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8차선 도로가 텅 비어 겨울 벌판처럼 보였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추웠던 기억이 난다. 털신을 신고 장갑을 끼고도 추웠던 그 길을 몇 번이나 신이 나서 왔다 갔다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래되고 나무가 많은 곳이라 사진을 찍으면 멋지게 나온다. 큰 아이가 고등학생일 때 1년 정도 혼자 미국에 있었다. 그 때 외로울까 집 주변 풍경을 많이 찍어 보냈는데 겨울 풍경 사진 몇 장이 고즈넉하니 좋아 지금껏 남겨두었다. 지나고 보니 아이는 혼자 있어도 그다지 외로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더 외로웠나 보다. 우리 집을 기억하라고 사진도 찍고 아이에게 왜 자주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괜히 투정도 부렸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겨울은 내게 외로움이었다. 서울로 오고 첫 겨울은 내게 혹독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여름과 가을이 지나면서 임신한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날이 추워지니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쉽게 이웃을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소담하게 쌓여 창밖을 밝혀주는 눈이 겨울의 기억이 되었다. 왜 그리 담장은 높고 야트막한 그 계단이 멀게만 보였을까?

나는 신혼의 첫 집에서 즐겁게 지냈다. 새로운 곳은 낯설었지만 신기하고 재미난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날이 추워지고 몸은 힘들어지면서 점점 외롭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원 가족과 떨어져 처음 지내는 겨울이라 더 그랬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나는 조금 고독했다. 멀리 혼자 있던 아이보다 남아 있던 내가 더 아이를 그리워했던 걸 보면 말이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겨울을 느끼며 사는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즐거운 겨울이지만 여전히 조금 외로움이 묻어 나는 겨울. 그냥 겨울이 주는 마법이라고, 그냥 조금씩 견디는 거라고 이야기 해야겠다. 외로움도 조금 즐기자고 이야기 하면 혼이 나려나. 늘 나의 감정은 갈무리가 되지 않는다. 외로움도 즐거움도 엉켜버렸다. 그냥 조금씩 외롭지만 조금 더 즐거운 것이 겨울이라고 해야겠다.

                                                    - <수필과 비평 2023년 10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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