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망의 목적어
김명희
jinijuyada@naver.com
버스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제법 한참 올라가면 작은 학교와 예비 수녀들과 기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위한 더 작은 수도원이 있는 나의 모교가 있다. 졸업한지 삼십년도 훌쩍 지나버려 학교의 풍경이 여전히 그 모습일지 궁금했다. 결혼을 하면서 부산을 떠나고, 부모님도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학교는 추억 속에만 남았다.
천주교 재단이라 우리 학교의 시간표에는 종교 수업이 주 1회 있었다. 작은 수도원이 교내에 있어 교사들 중에 수녀님도 몇 분 계셨고 가끔씩 신부님도 보이곤 했다. 1학년 종교수업을 해 주신 분은 금발에 푸른 눈의 앤 던딘 수녀님이셨다. 그분은 우리학교의 전임 교장이기도 했는데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오래 머무르신 수녀님은 한국말을 무척 잘 하셨다. 우리는 외국인 선생님이라는 낯설음을 크게 느끼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 종교라는 과목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아마도 수녀님이 종교를 강요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사람에 대하여,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함께 이야기해 주는 분위기라 편안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또 신의 영향 안에서라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들은 중에 유독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열렬히 그녀를 사랑하여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여러 날을 걸려 그녀에게 달려갔다. 집안에서는 모두가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고, 그 누군가가 자신임을 안 남자는 당당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인은 누구인지 묻기만 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계속 집 안의 여인에게 이야기했다.
“나요 (It's me).”
“나요(It's me).”
하지만 여인은 몇 번이고 물어보기만 할 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여인의 말에 돌아온 남자는 여인을 원망하며 방황했다. 오랜 방황 후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남자는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잔치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는 그 집의 닫힌 문 앞에서 누구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그가 말했다.
“당신이오 (It's you).”
그러자 문이 활짝 열리고 그녀가 뛰어나왔다. 여인은 그를 안으며 오랫동안 당신을 위해 잔치를 열고 기다려왔다고 하며 집안으로 데려갔다..
이야기는 오래 기억이 났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의문이 남아 문득 생각나는 듯 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수녀님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수녀님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 하셨지만 나는 의문만 들었다. 신 앞에서 ‘나요’ 라고 하는 대신 ‘당신이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내가 어떤 종교인의 입장이라면 이해 가능했으리라 생각했다.
가끔 생각한다. 나였다면 그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나요’ 라고 했을까, ‘당신이오’라고 했을까? 내가 욕망하고 원하는 것들을 찾을 때 나는 무엇을 목적어로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남자처럼 나라고, 내가 당신에게 왔다고 말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을 했던 많은 날들, 거기에는 늘 '당신'이 있었다. 당신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늘 사랑의 대상은 당신이었다. 미워한 적도 있었다. 왜 내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왜 미워하는지 이유를 알 때도 있었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당신을 미워한 적도 있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을 미워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도 나를 위해서 라기 보다 부모님, 남편, 아이들,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당신을 생각하며 결정을 해 왔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온전히 나만을 사랑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기도 했다. 욕망하는 것이 ‘나’였을 때가 있었던가? 사랑을 한다는 건 늘 어떤 대상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 자리에 나를 대입시킨 적은 없었다. 나 자신이 원한다고 믿었던 것 중에서 진실로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결정했던 것은 언제였나?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은 항상 '너'에 속해있었다. 내 욕망의 끝이 언제나 내가 아니라 너라고 하는, 나 이외의 어떤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를 아프게 했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 사랑법이 있다고 친구가 말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긴 수다를 떨고 난 다음이었다.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라고 했다. 양 팔로 나를 꼭 끌어안고 “수고했어! 애썼어!” 라고 말해주라는 친구의 말을 따라 두 팔을 넓게 벌렸다가 양 어깨를 안아 주었다. 나를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장난처럼 피식 웃음이 나더니 잠시 후 목에서 왈칵하고 열기가 올라왔다.
멀리서 보는 강의 물결은 언제나 잔잔해 보이는 것처럼 평온하다고 믿은 마음은 가까이서 자신을 마주하지 않아 가능했을 것이다. 껴안은 어깨가 떨렸다. 내가 안고 있는 것이 ‘너’가 아니라 ‘나’ 임을 되새겨 보았다.
너가 아니라 나를 안는 것. ‘나의 행동은 언제나 나를 목적으로 하게 하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는 원한다. 나의 목적어가, 내 욕망의 끝이 언제나 네가 아니라 나이기를. 그리고 당신의 목적어도 언제나 당신이기를!
-2022년 《인간과문학》 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