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조선왕실 의궤(儀軌)가 돌아왔다. 병인양요(丙寅洋擾)때 빼앗겼으니 145년만이다. 그런데 반환이 아닌 ‘대여’ 방식으로 왔다. 약탈당한 우리문화재를 빌려왔다는 해괴한 소식을 들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인상 깊게 본 궁중기록화 하나를 떠올렸다.
<순조기축진찬도병(純祖己丑進饌圖屛)>. 1829년 2월 순조의 사순(四旬)과 즉위 30주년을 맞아 효명세자 익종이 부왕께 올린 축하잔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그 행사의 내용은 《순조기축진찬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궤란 무엇인가?
왕실의 각종 행사, 이를테면 결혼·장례·왕세자의 탄생·왕의 궁궐 밖 행차·궁궐 공사 같은 일을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왕이 내린 명령이나 신하들의 보고는 물론이고 행사에 든 비용과 물품, 건물의 설계·제작 등 모든 내용이 담겨있어서 이 기록만 보면 어떤 행사든 거뜬히 치를 수 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자랑거리인 조선왕실의궤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순조기축진찬도>.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치 시공을 넘어 조선의 대궐마당을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온갖 깃발이 펄럭이는 의장 대열과 겹겹 정렬한 호위 군사들로 에워싸인 궁전의 모습은 숨 막히게 장엄했다. 비단에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만 봐도 왕실행사가 얼마나 호화롭고 엄격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화면의 오른쪽은 2월9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벌인 왕과 대신들의 잔치요, 왼쪽은 2월12일 자경전에서 왕비를 비롯한 내외명부 여인들의 잔치 광경이다. 이렇듯 다른 날짜의 행사가, 또 하루에도 시차가 있는 여러 장면이 한 화면 위에 다시점(多視點)으로 묘사되어있다. 나도 처음엔 그 화법을 몰라서 화면의 장면들이 모두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 우를 범하기도 했다. 궁중기록화는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국가 소속 도화서(圖畵署)의 전문화가인 ‘화원(畵員)’들이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유명한 단원 김홍도도 도화서 화원이었다.
명정전의 조정마당 월대 중앙의 궁중악단 양쪽으로 줄맞춰 정좌한 신하들, 그리고 그 위에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펼쳐졌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는 상징적으로만 표현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왕비를 대신하여 거북무늬 주렴 주위에 서린 내밀한 권위가 아련했다.
잔치마당에 춤과 노래가 빠지랴. 자경전 마당에 빈틈없이 채워진 여러 종류의 현란한 궁중무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선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무용경연대회라도 벌어진 것일까. 본격적인 축하공연은 순원왕후가 주관하는 내연의 무대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화려하고 농익은 춤판에 빠져든 나는 아예 전시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죽여 바라보았다.
날아갈 듯 아리따운 여인들 한 무리가 호화롭게 장식된 빨간 배(彩船)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돌아가고 있다. 서울과 경기 기생이 추었다는, 20여 명의 날개옷 황홀한 원무 속으로 빨려들듯 들어섰다. 어기야디야! 어기야디야! 같이 돌고 싶었다. 선녀 같은 무희들과 어느새 어울어져 나도 같이 <선유락(船遊樂)>, 뱃놀이춤을 너울너울 추고 있었다.
대궐잔치의 노래와 춤을 ‘정재(呈才)’라 한다. 내가 이 그림 속의 춤, 정재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곱 종류나 되는 궁중무용의 다양함과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한 낯설음에 대한 동경, 그리고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유혹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가졌던 무용가로의 꿈이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
긴 족자 양옆에 빗자루를 거꾸로 세운 모양의 빨간 대나무 장대를 든 무희(竹竿子)가 앞을 서고 금잣대(金尺)를 든 무희가 뒤따라가는 춤이 눈길을 끌었다. 조선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정도전이 춤으로 표현한 정재, <몽금척무(夢金尺舞)>다. 금척은 왕실의 정치적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물(儀物)이다. 잠저(潛邸)에 있을 때 태조이성계는 하늘에서 금척을 받아 왕이 될 예시를 받았다고 했다. 의미가 깊지만 장중하고 느리게 진행되었을 터. 모처럼 궁궐 나들이한 사대부 부인들이 지루해 몸이 비틀리고 잠깐씩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았을까.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혼자 키들거렸던 추억도 있다.
춤 말고도 시선을 끈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체통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충격적 차림새다. 에헴! 거드름을 부릴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머리에 꽃을 달랑달랑 매달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사로운 날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꽃을 꽂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그 후에야 알았으니까.
또 하나는 몇 겹 종대로 서서 잔치마당을 엄호하고 있는 호위군사 사이에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또 음식을 상에 올리고 내려와 월대 옆에 서서 소곤대는 모습이다. 스냅사진에서 예상치 못한 흥미진진한 광경이 포착된 것을 볼 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자로 쓴 기록이라면 이런 대단찮은 이들의 흔적까지 남겼을까.
마침 기회가 왔다. 드디어 <순조기축진찬도> 속의 춤 장면을 재연하는 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2005년 11월 셋째 일요일. 이달의 문화인물인 ‘춤을 사랑한 조선의 왕, 효명세자’ 기념행사 중의 하나로 창덕궁 인정전 조정마당에서 벌인 정재의 춤판. 효명세자는 창작정재를 발표할 만큼 음악과 무용에 조예가 깊었으며, 400여수의 시도 남긴 성군 재목이었다는데.
<포구락(抛毬樂)> 차례였다. 포구락은, 어른 키 정도의 네모난 틀(포구틀)을 세워놓고 건너편에서 포구틀 위쪽에 뚫린 작은 구멍(風流眼)에 예쁘게 채색한 공을 차례로 던져 넣기를 겨루는 놀이 성격의 춤이다. 지엄하신 분 앞에서 늘 긴장했을 무희들도 이 춤을 출 때만은 그 놀이를 즐기며 추었다던가.
먼저 무대로 이용된 인정전 월대 위에 포구틀이 세워졌다. 꽃을 든 봉화와 붓을 든 봉필이 등장했다. 공을 던져서 포구틀 작은 구멍 속으로 집어넣은 무희는 상으로 꽃을 받고, 실패한 무희에겐 벌로 시커먼 먹 수염이나 연지곤지가 여지없이 그려졌다. 상을 주는 봉화와 벌을 내리는 봉필이, 콧수염 난 무희도, 그리고 인정전마당의 초겨울 추위도 아랑곳 않는 관객들 모두가 벙긋거리는 한마당이었다.
2011년 현재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얼마나 될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미국·중국·영국·러시아·독일 등 18개국에 확인된 것만 10만7,857점이나 된다한다. 힘없던 때 잘 지키지 못해 전 세계로 흩어진 걸 생각하면 답답하기 한량없다. ‘우리문화재 되찾기 운동’이 있지만 현존 국제법으론 쉽지 않은 일이란다.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발견하고 세계에 알린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나, 돈황 석굴에서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찾아낸 폴 펠리오(Paul Pelliot) 같은 사람을 가진 프랑스를 부러워하고만 있어야 할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우리 기록유산은 9건이나 된다. 이는 세계에서 5번째이며 아시아에선 단연 첫 번째다. 이는 우리 선조의 위대함을 말한다. 그 후손인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