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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압!    
글쓴이 : 윤지영    24-01-01 14:44    조회 : 2,219

2011년 겨울, 그날이 그날, 일상이 지겹기만 했다.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상이 평온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만도 아니고 그저 불쑥 뭐에 씐 듯이 좀이 쑤시는 데 그럴 때면 뭐든 안 해본 걸 해야 숨이 쉬어진다.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습관대로 평소 안 다니던 길을 여기저기 기웃대며 소득 없이 한참을 돌아다니다 집에 오는데 좁은 골목길에서 대한검도회라고 적힌 ‘레트로’감성 충만한 도장 간판을 만났다. 

  어라? 이런 데가 여기에 있었네 싶어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잘생긴(?) 여자 관장님이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큰 키, 탄탄하고 다부진 체격, 짧은 숏 커트 머리를 하고 검도복을 입은 관장님은 여고 시절 소년미를 내뿜어 인기 많던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키도 체력도 요만한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느냐고 호기심을 담아 묻자 관장님은 성인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들도 한다며 학생들이 사용하는 죽도들을 보여주셨다. 과연, 나에게 맞는 것도 있겠구나 싶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니 이게 웬 횡재인가. 그 자리에서 매일 아침 7시에 있다는 첫 수업을 등록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간단하게 씻고 집을 나서니 차가운 공기에 잠이 완전히 깼다. 새벽형 인간이 된 듯해 뿌듯한 마음으로 도장에 들어서는데, 이런 난처할 데가 있나. 그 시간에 나오는 학생이 나 혼자였으니…. 밤새 찬 기운을 끌어모은 도장은 정말 추웠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춥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깊은 겨울로 갈수록 대형 히터를 빵빵 틀어도 한 시간을 내내 뛰고 나서야 도장 안의 온도가 영하를 간신히 벗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추위에 한 시간을 맞서려니 가끔은 정말 가기 싫었지만, 집도 먼 관장님이 나와의 수업을 위해 먼저 와 있다 생각하면 몸이 아무리 무거워도 눈이 저절로 떠졌다. 

  몸을 간단하게 풀고 나면 본격적인 기본동작 연습이 시작됐다. 갯수는 200개. 앞으로 뛰어 한발 내디디며 머리 위로 든 죽도를 내리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머리 뒤로 넘기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첫 몇 주는 죽도를 휘두를 때마다 몸은 힘없이 휘적대고 죽도는 머리 뒤로 넘길 때마다 팽그르르 돌았다. 이게 연습한다고 나아질까 의심하며 몇 주를 버티자 어느새 죽도가 제멋대로 놀지 않았다. 팔에는 내 눈에만 보이는 근육이 붙었다. 멋진 관장님 옆에 서서 기본동작을 하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더 이상 못 봐줄 정도는 아니게 된 무렵, 관장님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네? 저요? 제가 승급 시험을요?” 
 가슴이 순간 콩닥 뛰었다. 그 간의 내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대대적으로’ 자랑했다. 5급 시험을 보게 되었노라고, 사람에 따라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꾸준히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단 두 달 만에 보게 된 거라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드디어 승급 시험날이 되었다. 처음으로 이른 아침이 아닌 늦은 오후에 간 검도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관장님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봤다. 그것도 무더기로. 나와 체구가 비슷한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한참 작았다. 그럴 수밖에, 초등학생 아이들이었으니까.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좀 모자란 걸리버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나는 절대로,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를 되뇌이며 조용히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줄을 섰다. 한 줄씩 차례로 승급 시험이 진행되어 드디어 우리 줄의 차례가 되었다. 

   “머리, 하나! 머리, 둘!...”
   “허리, 하나! 허리, 둘!...”
   “손목, 하나! 손목, 둘!...”

   꼬꼬마 아이들과 통통 뛰며 큰 소리로 숫자를 세고 마침내 마무리 기합을 지르며 츳츳츳, 앞으로 발을 끌듯이 치고 나가며 “이야압!” 
   승급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특별시검도회’가 찍힌 급증과 대한검도회 회원증을 받았다. 생김새가 좀 초등학교 상장 같아 보여 ‘아아, 자랑하기에는 조금 무안하려나…’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정말 내가 자랑스러웠기에 곧바로 SNS에 올렸다. 


  2개월이 지나 4급으로 승급한 후, 깨어나는 흙내음이 새벽 공기에 살풋 섞인 아침이었다. 도장 안에 키가 큰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어머, 학생이 늘었나, 내 후배인가 하며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관장님이랑 친한데다 도장에도 익숙했다. 알고 보니 나보다는 어리지만, 우리 도장만도 몇 년이요, 검도는 그 전부터 했던‘고수’였다. 대학 앞에서 약국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약사님 친구까지 합세해 매일 아침 연습 인원은 셋이 되었다. 
    몇 주 후, 관장님이 내게 호구를 맞추자고 했다. 체구가 작으니 아이들용으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오래오래 할 거니 좋은 걸로 하겠다며 수제 호구를 주문했다. 언제 받는지 매일 묻는 기다림 끝에 호구를 받으니 우습게도 강력한 군단의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호구를 장착하는 과정은 작은 의식이었다. 먼저 무릎을 꿇고 앉아 두건과 장비를 정갈하게 정리해서 늘어놓는다. 그 후 하나씩 갖춰서 장착하는데 한두 번 가르침을 받아도 서투른지라 그 친구가 옆에서 도와줬다. 다정한 성품인 듯 묵묵하게 도와주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사형’으로 삼았다. 호구를 쓰고 번갈아 타격대를 치고 관장님과 대련하는 게 루틴으로 자리 잡아가던 어느 날, 관장님이 갑자기 사형과 대련하라고 했다.
    뜻밖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우리 따뜻한 사형’인지라 나는 한 톨의 긴장 없이 그의 앞에 섰다. 그런데 대련이 시작되니, 이게 웬일인가, 사형이 쉴 틈 없이 “머리!” “허리!” “머리!”를 외치며 나를 두드려 패는 게 아닌가. 키가 180은 족히 되고도 남을 남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는데, 그래도 체면이 있지, 이를 악물고 몇 번 덤벼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나를 무자비하게 계속 치고 빠지는 걸 당하다 보니 비록 오늘 너를 이길 수는 없어도 내 언젠가는…, 하는 오기가 생겼다.
   “두고 봐, 내가… 내가 복수할 거예요.” 
    그렇게 나는 텅 빈 도장을 배경으로 갑옷을 두르고 호구를 쓴 채 긴 검을 쭉 빼 들어 적을 겨누며 복수를 선언했다. 
    

   슬프지만 이게 나의 검도 인생에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장면이다. 얼마 뒤 검도를 그만뒀으니까. 전국 검도 선수권대회를 가을에 나가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그렇게 매일 열심을 부리던 중, 아침에 일어나려 눈을 떴는데 목뒤부터 찌르르하더니 허리의 척추까지 통증이 ‘길이 이렇게 나 있소’라는 듯 내려갔다. 심상치 않은 듯하여 병원에 가니 디스크 진단이 나왔다. 앞으로 운동은 검도는커녕 등산도 하지 말고 걷기만 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나의 검도인으로서의 삶은 아쉽게도 막을 내렸다.

   내 성에 찰 때까지 가보지 못한 길이요, 두 번 다시 못해 볼 도전임을 알기에, 그래도 해본 게 어디야 하며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는데, 코로나 시국 2년 차에 갑자기 사형에게 톡이 왔다.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고 보낸 톡에서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요즘도 소식을 드문드문 주고받는 데 그럴 때면 쟁취한 승리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웃는다. 그리고 속으로 외친다. 머리! 이야압!


[에세이문예 2023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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