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도 몰라!
죽는 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정신이 말짱할 때 어떤 사람은 유서를 쓰기도 하지만, 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가서 ‘연명치료 거부 신청서’를 썼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인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등록증’을 손에 쥐는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에, 생존 기간을 늘리는 것보다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비우는 연습을 했다. 옷을 하나 사면 하나를 버리고, 입지 않고 몇 년째 장롱에 넣어둔 양복이며 이름 있는 등산복을 ‘재활용 수거함’에 넣었다. 얼마 전에는 애지중지 아끼던 카메라를 둘째 사위에게 주었다. 카메라 받침대와 설명서를 챙겨주면서 간단하게 사용법을 설명했다. 사위가 고맙다고 하면서 미안해 했다.
“장인어른이 아끼던 카메라 아녀요?”
“한때는 그랬지! 요새 다리도 아프고 해서 나보다 자네가 더 필요할 것 같아.”
“더 쓰셔야죠.”
“박 서방이 사진 찍기 좋아하잖아! 은혜랑 둘이 사진도 찍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어.”
큰사위는 카메라가 있고 둘째는 없는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자주 올렸다. 카메라가 쓸만할 때 넘겨주는 게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며칠 후 딸(은혜)한테 전화가 왔다.
“사위가 카메라 줘서 감사하다네요. 그러면서 장인이 은혜를 자기한테 넘겨주듯 카메라도 주었다며 감사한 마음에 말도 제대로 못 했다네요.”
“그래, 여행 다닐 때 카메라 가지고 다니렴. 작품 사진도 찍고.”
내친김에 책 100여 권도 버렸다. 여느 때 같으면 책을 버리기 아까워서 신줏단지 모셔놓듯 차곡차곡 쟁여놓으련만!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 내 마음을 더욱더 흔들었으므로.
아버지가 교수였는데 세상을 떠나자, 아파트 앞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영정사진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어느 날 친구들 모임에서 ‘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했다고 하니까 고향에서 올라온 친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든디.”
“뭔소리여! 울 엄니는 환갑 때 ‘수의’를 해서 장롱 위에 올려놨는디 구순이 넘었어야. 죽고 사는 일은 귀신도 모른디야! 자네는 해마다 유언장을 쓴다며?”
“부모한티 잘하는 놈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고 못 하는 놈은 국물도 없지.”
친구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데 ‘부모한테 잘하는 자식은 유산으로 논밭을 많이 물려주고 못 하는 자식은 밭 한 뙈기도 없다’고 말했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가 한마디 덧붙였다.
“유언장을 쓴다는 것을 둘째가 눈치를 챘나 봐. 전화 한 통 없던 놈이 요새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안부 전화 한단게. 내년에 유서 쓸 때는 논 몇 마지기 더 얹어 줘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 중이네.”
나이 들면 재산이 많아도 ‘누구를 더 줄까?’ 걱정. 재산이 없는 사람은 자식한테 물려줄 재산이 없어서 걱정. 사람이 언제 죽을지 귀신도 모른다는데,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이런저런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모양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추석 밑에 차 몰고 부모님 산소에 벌초하러 가는 중이다. 호남평야를 지나고 있다. 차창 너머로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을 바라보며 벼와 나, 번갈아 생각했다. 벼는 익어서 고개를 숙이고, 내 얼굴엔 주름이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는가! 잠시 생각에 젖어 있다가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 몸을 아프게 하고/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갑니다~.
목성들의 글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