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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윤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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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에게    
글쓴이 : 윤기정    24-01-18 06:58    조회 : 1,681

J에게

 

 

윤기정

 

얼른 오시게, 친구. 말이야 편히 틀 사이지만 이제 70이 넘었으니, 오늘만큼은 점잔 좀 떨기로 하세. 추석이 사흘 뒤라 달이 밝구먼. 이런 밤이 권커니 잣거니 술 한 잔 나누기에는 딱 좋은 날 아니겠나? 하기야 자네와 내가 술 마시기 딱 좋은 날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니네만. 자정도 넘어 술잔에 어린 달그림자 지우려 먼저 한잔하네. 서둘러 오시게.

오래전 일일세. 때는 가을이었고. 막 중간 체조하러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네. 교무실 전화벨이 울리고, 보조원이 전해 주는 수화기를 건네받으며 등줄기로 찬 기운이 전기처럼 흘렀지. 자네 이종 누이의 흐느낌으로 알았네. 듣고 싶지 않은 일, 오지 말았어야 할 일이 왔음을, 조회대에 올라서자 어김없이 따라라 랏 따라라 랏경쾌한 반주 속에 힘찬 구령이 운동장을 울리네. ‘국민체조오 시자꾸 빨라지는 동작을 음악에 맞추려 몇 번인가 중단했을 거네. 그래도 아이들은 태엽 감은 인형처럼 정해진 동작을 차례로 해나갔을 걸세. 누군가 어깨를 감쌀 때까지 체조가 끝나고도 조회대 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네. 바닥에 번지는 몇 방울 눈물 자국이 가을볕에 반짝였지.

하얀 시트에 덮인 자네의 든든한 가슴은 뛰기를 멈추었더군.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걸을 수도, 시시덕거리며 소녀들 이야기를 나눌 수도, 세상의 정의를 외치며 소주잔을 비울 일도 더는 없음을 그 가슴이 말해주더군. 금방이라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 것만 같은 잘생긴 얼굴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병원 창밖으로는 불 밝힌 차량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네. 표정 감춘 맹수처럼 눈에 불을 밝힌 차들이 먹잇감을 노리듯 밤거리를 질주하고 있었지. 자네를 앗아간 맹수들의 질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네.

모두 잘 지내네. 봉이는 치과 의사로 일한다네. 지금도 소주는 약하고. 진이는 친환경 사업 쪽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서 잘 나가고 있네. 항상 바쁘다네. 선이는 물려받은 게 많은지 은퇴하고 강남서 폼 잡고 사네. 알다시피 강이는 미국서 완전히 터를 잡았지. 은퇴했는데 역이민도 쉽지 않은 모양이야. 얼마 전 큰 병이 왔는데 고비를 잘 넘겼다고 하여 다행이네. 금주(禁酒)령을 받았으니 거의(?) 끊겠지. 도서반 친구들 여전히 샌님들이라네. . 금이는 만났지? 연전에 그리로 갔어. 내 얘기? 그건 만나서 하기로 하고. 아 자네는 다 알고 있을 텐데 괜한 수다 떨었나 보이. 그 동네 사람들은 별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데 사실인가? 친구들 가끔 양평 내 집에서 만난다네. 늙은 마누라들 데리고, 손주들 데리고 오기도 하지. 너는 왜 안 부르냐고? 동부인(同夫人) 모임이야. 자넨 자격이 없지 않은가? 허허 미안하네. 자네 싱글 아닌가? 혹 자격 갖췄으면 귀띔 주시게.

궁금하고 불안했던 미래가 벌써 과거가 되어가고 있네. 까짓것 별것 아니었는데 싶기도 하네. 자네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명문 Y 대의 행정학도였으니 고시 합격하고 고위 공무원을 했거나, 어쩌면 정치인이 되지 않았을까? 꼭 그 길을 가지 않았어도 공부 잘하고 주변 잘 살피는 성품이니 어디서라도 큰 역할을 하고 은퇴했겠지.’ 내 예상이 거의 맞을 걸로 생각하네. 어려운 환경에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표시 나지 않게 나를 챙기던 세심한 마음을 내가 어찌 몰랐겠나? 자네 떠난 가을이면, 한 날을 잡아 자네를 부르기로 했네. 날짜를 정한 건 아니고, 내 마음이 내키는 날이 그날일세.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여전하지? 자네가 걱정하던 나의 조급함, 경솔함은 많이 나아졌네. 이성보다 정에 쏠리는 약점은 여전한데 그게 강점일 때도 있다네?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네. 혹여 자네가 못 알아보면 안 되니까. 낙엽 지는 소리가 이리 큰 데, 아직도 나서지 않았는가? 낙엽 한 장에 술 한 잔일세. 보름 가까운 달이 하늘 가운데를 지나는데 벗은 아직 보이지 않누나. “J. 술 쉬겠다.”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구먼.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에서 위문편지 답장 받은 사람은 자네 혼자였지? 여자 이름 덕분에.

대학 졸업을 넉 달 앞두고 친구 J는 많은 사람의 기대를 벗어놓고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졌다. 11월 늦가을 어느 날 J는 그의 고향 앞산에 햇빛 한 자락 요 삼아 누웠다. 그리고 우리는 붉은 흙 한 삽씩 눈물에 적셔 덮어 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우정을 쌓으며 들끓던 청춘의 시간을 같이했던 친구 J, 내가 뒤처질 것을 염려하여 용기를 나누어주던 J는 그렇게 그리운 사람의 목록으로 옮겨졌다.

 

밤바람이 차가우이. 이젠 가을 소슬함도 이겨내기 어렵구먼. 오늘 밤도 아름다운 선녀들이 놓아주지를 않는 모양이군. 그놈의 인기는 어디서나 여전한가 보이. 자네 잔 내가 비우고 들어가려네. 저 달에 이 글 실어 보내니 저 달 만나는 날 받아 보시게. 부디 과음하지 마시게. 나 갈 때까지 건강해야지. 오랜만에 이름 한번 불러보세. , , ,

2023. 12. '토포필리아,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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