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피는 꽃
윤기정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자 첫 행이다. 시인은 경계에 핀 꽃을 보고 우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경계에는 ‘꽃이 피어야 한다.’는 당위를 촉구한다. 시인은 경계에 꽃이 피기를, 더 나아가 경계마저 없는 세상을 노래한다. 경계라면 긴장을 떠올리는 나와 달리 시인은 경계,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경계 없는 세상이라?
언론에서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한다. 언론에서 보도한 극단적 선택의 사연은 하나같이 안타깝다. 내용을 알만한 사연이면 안타까움은 더 크다. 한때 맞닥뜨렸던 상황이기에 내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민원 관련 사연이 그렇다. ‘악성 민원’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여러 달에 걸쳐서 어느 담임 선생님을 힘들게 했던 민원이 생각난다. 민원을 낸 학부모나 자녀인 학생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일이었다. 정년퇴임을 앞 둔 해였다. 2학기 시작한지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6학년 담임 선생님 한 분이 상담을 원했다.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1학기 말, 선생님이 급한 일로 찾아온 학부모와 잠깐 교실 밖 복도에서 상담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간단한 과제를 주고 나갔는데 한 학생이 옆 친구를 괴롭히며 학습을 방해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학생의 책상을 몇 차례 두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학생의 말을 전해들은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그럴 리도 없고, 그렇더라도 선생님의 처리가 교육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선생님의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즉시 학부모 상담으로 오해를 풀었는데, 여름방학 때 일이 엉뚱하게 번졌단다. 성당의 여름방학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무개가 선생님께 야단맞았다’는 이야기를 수녀 한 분이 들었다. 수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아이는 별 생각 없이 제 잘못은 없다며 상황을 부풀려서 이야기 했던 모양이다. 제 책임을 피하고 남에게 전가하는 이른바 자기합리화였을 게다. 아이의 말에 놀란 수녀가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는 자기들이 알고 있던 사실과 너무 달라서 가라앉았던 민원에 다시 불이 붙은 상황이었다.
부모의 주장은 ‘아이가 수녀님께 거짓말했겠느냐?’와 ‘수녀가 왜곡해서 전달했겠느냐?’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담임 선생님을 불신하고 있었다. 종교인까지 등장한 신뢰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사실이 설 자리가 없었다. 교직 경력 3년 차인 젊은 여선생님이 감내할 수준을 넘은 것으로 판단했다. 선생님을 설득했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선생님 체면이 깎이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짓자’고 제안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제안이 아니라 지시로 들렸을 것이다. 교장실에서 부모와 담임 선생님이 마주 앉았다. 선생님이 준비한 사과문을 읽었다. ‘체벌은 없었다. 앞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는 꾸지람은 자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에게 미안했다. 빨리,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었던 욕심이 앞서서 선생님의 사과를 강권한 것만 같다. 어느 쪽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후회와 선생님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마음이 무겁다.
학부모와 교원은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역할과 위치가 달라서, 그 사이에 심리적 경계랄까, 긴장감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민원 제기도 상수로 존재한다. 민원을 부적절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옳지 않지만, 본질적 문제는 뒷전이고 명분 다툼으로 번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쉽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만원이 감정 대립이 되지 않도록 구성원 모두 주의하고 감정적 언행을 삼가야 한다. 민원을 학교 교육에 대한 피드백(feedback)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졸업식은 며칠 뒤로 다가왔다. 교육과정 운영이 끝난 이즈음이면 학습 분위기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는 학년 단위 교육 활동이 더 유익하다는 판단에 1박 2일 졸업 수련회를 운영했다. 첫날 저녁 식사 후 야간 활동 운영을 논의하는 교사들 방에 수련원 직원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한 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옥외 계단참에서 자신을 향해 침을 뱉었단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는 형체가 보이더란다. 부러 한 짓이로구나 하는 괘씸한 생각에 뛰어 올라가서 범인(?)을 잡았다고 했다.
남성의 한 걸음 뒤에 고개 숙인 범인이 서 있었다. 2학기 초 문제 민원의 주인공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응‘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부모에게 알리자. 제 자식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주자’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토를 달았지만 내 생각은 오로지 응징이었다. ‘교장 선생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타이르죠. 아직 어리잖아요?’ 여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몇 달 동안의 시달림과 고통은 다 잊은 듯 보였다. 선생님들 의견도 그랬다.
졸업식이 있었고, 2월의 마지막 날에 정년퇴임했다. 학생도 나도 떠났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를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그해 그 일이 떠오른다. 후회가 남아서 일게다. 시인이 노래한 경계를 생각한다. 경계가 없으면 좋겠지만 경계는 있다. 오히려 사회 곳곳에 경계가 느는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시인의 꿈처럼 모든 경계에 꽃이 피면 좋겠다. 꽃향기 나누어 맡으며 서로 경계를 존중한다면 그리 나쁠 일도 아니다. 경계의 존중은 다름의 인정 아니던가! 지금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이 되었을 학생과 부모님, 선생님. 모두 그 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따뜻해졌기 바란다. 처음부터 악성 민원은 없다. 하지만 모든 민원은 악성이 될 수 있다. 민원을 꽃으로 피워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서울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의 영혼이 경계에 핀 꽃이거나, 향기 되어 경계를 넘나드시라 빈다. 선배 교사로서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이 글에 담아 올린다.
2023. 12. '수필과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