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를 바르듯이
홍정현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기 전에 스트레칭부터 합니다. 밤사이 잠을 뒤척이게 만든 목부터 요가링으로 눌러주고, 필라테스에서 배운 동작으로 등과 어깨 근육, 골반, 다리, 발목을 풀어줍니다. 풀어주지 않으면 방바닥에 발을 대고 기립하려는 순간 묵직한 통증에 엉거주춤 걷게 되거든요. 인간의 직립보행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오십 년 동안 해왔던 그 몸짓이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요즘 체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갱년기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간혹 ‘갱년기인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여성 어르신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때 그분 표정에서 저의 ‘갱밍아웃’이 엄살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읽습니다. 그 질문에는 이런 말이 포함된 것 같아요. 실제 듣기도 한 말입니다.
“우리 때는 그런 거 모르고 지나갔다.”
우리 때는 사는 게 힘들어 모르고 지나갔는데, 요즘 애들은(중년들은) 참 유난스럽다. 이런 의미이겠지요? 인정합니다. 제가 좀 유난스럽지요? 그것은 ‘유난스러운 갱년기’가 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갱년기는 유난스럽습니다. 사는 게 쉬워서 유난스러운 건 아니고, 정말 유난스러운 증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의 불찰이라면 그것을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 그러니 의심은 접어두셨으면 합니다.
갱년기 증상을 처음 느낀 건, 3년 전 고1 아들 담임선생님 상담 때였습니다. 남자분이셨는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느닷없이 가슴 부근에서 열 기둥이 훅 올라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겪는 증상이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결국 저는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에 홍조를 띤 학부모가 되어 담임선생님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건강검진에서는 온갖 수치가 널 뛰듯 달라졌습니다. 고혈압으로 두통이 왔고, 고지혈증으로 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녹슨 것처럼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앉았다 일어날 때 왜 바로 몸을 펴지 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무릎도 오래 접고 있다가 다시 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이고’ ‘아아’ 같은 소리가 그 과정의 배경음으로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열감은 주로 집중하거나 스트레스가 오면 올라왔습니다. 꽉 끼는 운동화를 신을 때, 신중하게 주차할 때, 중요한 휴대전화 문자를 보낼 때, 업무에서 실수했을 때 등등. 최근에는 단추를 달려고 바늘에 실을 꿰려다 열이 올라와 멈춰야 했습니다. 저의 열감은 종종 어지럼증을 동반합니다. 그럴 때는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니, 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면, 집중을 하지 마’라고 말하더군요. 남편의 무신경한 대답. 익숙합니다. 이제는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집중을 해야 할 일은 하지 말라고 하다니…. 저야 좋지요. 앞으로 집안일을 마음껏 대충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갱년기 증상 중 최고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장현성 배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인은 갱년기, 큰아들은 고3(입시), 둘째 아들은 중2(사춘기의 절정)라 힘들다고요. 셋이 충돌했을 때 누가 이기냐는 질문에 그는 부인이라며, 갱년기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바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는 갱년기 여성인 거죠.
남편은 자주 말합니다. “내가 뭘 물으면 왜 화만 내?”라고요. 왜 화를 낼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화가 나니까요.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지나가다 흘낏 바라보며 “저 여자가 왜 저러는 거야?”라고 묻는 것은 드라마 ‘덕후’인 부인을 충분히 화나게 하는 일입니다. 관성의 법칙을 고수하며 빨리 펴지기를 거부하는 관절을 장착한 부인을 굳이 출동시켜 물건을 찾아달라고 하는 경우, 그런 일의 빈도가 높다는 점에서 화가 납니다. 문제는 저의 화가 밖으로 표출되는 임계점이 낮아졌다는 겁니다. 100℃에서 끓을 물이 60℃에서도 끓는 것처럼요.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저는 폭발합니다. 피해자는 가족입니다. 가장 큰 피해자였던 아들은 다행히 유학을 가 엄마의 화 폭발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아들과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부분 휴대전화 문자로만 대화하는데, 대양의 거대한 물리적 거리 덕분에 우리 모자는 현재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는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심지어 이렇게도 말합니다.
“화내는 엄마가 없으니, 좀 지루해요.”
여기까지가 저의 갱년기 증세입니다. 다 적으면 과하게 징징거리는 여성으로 보일 것 같아 일부만 적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의 증상이 갱년기와 빈둥지증후군, 코로나 팬데믹 증후군의 혼합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와 아들의 입시를 동시에 겪은 후 긴장감이 풀리며 제 몸은 호르몬의 변화에 더 민감하게 출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의사를 찾아가 호르몬을 처방받아 복용하기를 권하는 분도 있는데, 사정이 있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냥 저는 갱년기를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합니다. 운동을 싫어하는 제가 하루를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침 공기를 코로 잔뜩 마셔 복부를 팽창시키고 입으로 공기를 천천히 뱉습니다. 머리 안에 끼어 있는 불필요한 생각 조각들도 같이 내보냅니다. 숨을 내쉬면서 복부를 수축시켜 코어를 잡아주고 필요한 동작을 합니다. 밤 동안 뻣뻣해진 몸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앞으로 뭉치기 쉬운 근육을 미리 말랑하게 만듭니다.
끌려가느냐와 끌고 가느냐의 차이는 큽니다. 아침에 깊은숨을 쉬어 마음을 정돈하고 코어를 잡은 후 움직이는 동작은 단순한 스트레칭이 아니라 오늘도 내가 끌고 가겠다는 시작 버튼입니다. 힘을 꽉 주어 각오를 다지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달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태도에 의미를 발라줍니다. 스트레칭 동작과 스트레칭을 하는 자신에게 긍정의 은유를 부여합니다. 부드럽고 고소한 버터를 바르듯이요.
학산문학,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