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몰락
어렸을 적 나의 소원은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을 갖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산타에게 카드도 썼다.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을 주세요. 그러면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을게요.”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어둑한 방에서 둥근 탁자 위에 큼지막한 구슬을 올려놓고 손바닥을 댈 듯 말 듯 두 손을 놀리며 “미래가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TV에서 보아서였다. 하지만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이 목걸이를 이용해서 변신하는 것을 보니 커다란 구슬은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나는 산타에게 구슬 대신 목걸이를 달라고 했다.
그 시절에 소원은 별것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날씬해져서 예뻐지는 것”이었다. 어릴 때 나는 통통한 편이었는데, 마른 체구였던 오빠들은 늘 돼지라고 놀려댔다. 큰오빠가 “돼지!” 하면 작은오빠가 옆에서 “꿀꿀!”하고 추임새를 넣는 것이 어찌나 밉던지. 그렇기에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처럼 여러 번 소원을 빌 수 있는 무언가여야만 했다. 일단 날씬해지고 예뻐지면, 그다음에는 날 괴롭히던 오빠들을 응징할 참이었다. 그러나 기껏 소원이 그 정도라고 놀릴까 봐 누군가에게, 심지어 엄마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오빠들에게 복수하려고 한다고 혼날까 두렵기도 했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더는 “소원을 들어주는” 무언가를 찾지 않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산타에게 짝꿍의 필통을 달라고 했다. 개학하던 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정훈이 필통이 어떤 거니?” 엄마는 내게 물었고, 나는 더는 산타를 찾지 않았다.
교과서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이승복 어린이의 일화가 위인 이야기처럼 소개되던 시절, TV 뉴스가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전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늑대머리를 한 사람과 만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산타를 마음에서 놓지 못했다. “공산당은 다 죽어야 한댔는데…” 작은 오빠가 운을 뗐고 내가 대꾸했다. “반지로 죽이면 되잖아. 반지에서 레이저 광선이…” 오빠들은 자지러지게 웃어대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바보”라고 놀렸다. 오빠들의 태도는 매우 기분 나빴지만 왜 웃는지를 모르니 한마디도 대들 수 없어서 속상했다.
한참을 놀려대다가도 내가 울기 시작하면 오빠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면서는 우는 것도, 떼쓰는 것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어리광을 받아줄 어른이 학교에는 없었다. “잘못 못했습니다.” 같은 말실수에 아빠는 혼내려다가도 웃음을 터뜨렸지만, 선생님은 온 교실에 대고 내 실수를 언급하였고 같은 반 아이들은 큰소리로 웃으며 놀렸다. 다른 반 아이들도 굳이 교실로 찾아와 놀릴 때도 있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생각을 감춰야 함을 깨달았다. 오빠들은 단둘뿐이고 오빠들이 나를 놀리는 것은 유일한 여자아이로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질투에서였지만, 세상은 달랐다.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게 되면서 소리 내어 해도 될 말과 마음속으로 간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말을 가려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어른들이 본 적 없는 것은 공상이고 비현실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교실에선 줄 맞춰 앉아야 하고 숙제는 정해진 틀을 따라 해야 한다. 일기장 날씨는 언제나 맑음, 흐림, 눈 혹은 비. 선생님 말씀은 언제나 옳다. 세상은 내게 현실적일 것을 요구하였고 나는 그 요구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동심이라 불리는 것들이 사라지고 상상력은 파괴되었으며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내가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왕자님과 결혼하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는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다.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전 과목 100점이라든지 전교 1등이 아니라 산수 100점, 국영수 평균 90점 이상 받기 정도로 소박하되 구체적인 목표 말이다.
그러나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다고 해서 선생님이 된다거나 그 과목을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성취감은 일주일도 가지 않았다. 대신 목표를 세우고 달성할 때마다 나는 겁쟁이가 되어갔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바랐던 것을 얻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을 알게 됐다.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어 절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게 되었다. ‘신중’이라는 명목 아래 안전한 길만을 추구하려 했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아하려 노력했다. 불가능한 것은 목표를 이루는 데 불필요하므로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의 딸, 누구의 동생으로만 지내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 없는 삶은 무료했다. 오빠들을 향한 복수를 꿈꿨던 당돌한 꼬마는 내 안에 그대로 있었고, 내가 ‘현재’에만 머무르려 할 때마다 투정을 부리며 나를 뒤흔들곤 했다.
지루함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영화나 공연을 보러 다니고 여행도 다녔다. 그러다가 시작하게 된 글쓰기는 내 안의 꼬마를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아이가 던지는 구슬들을 글이라는 주머니에 담아내면 평온해질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한참을 멀리했던 소설과 시를 다시 꺼내 읽는 것으로 이어졌고, 책 속의 인물들은 모른 척하려고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그리는 데에서 오는 희열! 어쩌면 어릴 때도 구슬 하나로 바라는 것이 이뤄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역전된 상황에서 당황하는 오빠들의 모습을 보는 상상으로 즐거웠는지도.
이제는 소원을 이뤄주는 구슬을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차원 넘어 어딘가에 크리스마스 때에만 이 세계를 방문하는 산타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한다. 아빠한테 혼나고 엄마조차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 서러울 때, 상상 속에서 인어공주는 쪽지를 주고받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남산타워의 불빛을 보면서 고향 별로 돌아간 ET가 친구들과 재회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똑같이 생긴 ET들이 기계음을 내며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때론 라푼젤처럼 용감한 왕자님이 나를 데리러 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때보다 몇 배의 나이를 먹은 지금도 이따금 갓이 동그랗고 대가 두툼한 버섯이 몰려있는 것을 보면 파란색 생물체가 있지 않을까 두근거린다.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혼자일 때에는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이며, 여전히 마음속 한구석에는 왕자님을 만나고 싶은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몰락한 귀족이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듯 유년시절을 추억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소설 한 구절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
현실을 벗어난 생각은 즐겁다. 생각을 먹고 자란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싶고, 막히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는다. 책으로만은 채워지지 않을 갈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세상이 내게 금지한 것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세상에 관심을 두게 하며 세상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을 키우도록 이끈다. 동시에 나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돕고 꿈을 꾸게 한다. 죽은 자는 꿈을 꾸지 않는다. 저세상이 있든 없든 말이다. 꿈을 꾸는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데구르르, 딱딱, 퉁. 구슬 노니는 소리에 귀기울여본다. 그중 하나, 마음 이끌리는 것을 집어 글이라는 날개를 달아본다.
박지니
2024.06. 모던포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