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의 유혹
김영도
아침부터 폭염경보가 울렸다. 장맛비와 땡볕이 교대로 힘겨루기하더니 오늘은 땡볕이 이긴 모양이다. 늦은 아침을 먹자마자 남편이 산에 가자고 꼬드겼다. 말없이 재난 문자가 뜬 휴대폰을 내밀었지만, 산은 덥지 않다며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폭염도 재난이라고! 일요일에 집에 머물면 발에 가시가 돋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따라나섰다.
갓바위에 가기로 나섰다가 수태골 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렴 계곡이 낫지, 며칠 비가 왔으니 물도 많이 불었을 테고. 발이나 담그고 좀 쉬다 오면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춘향으로 나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내리꽂는 따가운 햇살도 산그늘에서 맥을 못 추고 사그라들고, 콸콸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땀을 말려주기에 충분했다. 숲의 푸른 그림자와 어우러진 새들의 지저귐 또한 경쾌했다. ‘큰까치수염’의 사진을 찍고 ‘산수국’의 화려한 자태에 마음이 쏠려 흥겨운 산행이 되었다.
완만한 산길이 좁아지며 가파른 길로 바뀌는 입구에 119차가 서 있었다. 몇 년 전 남편이 친구들과 산에 갔다가 정상에서 발목을 접질려 119 헬기를 타고 하산했었다. 그때 일이 생각나 가슴이 콩닥거렸다. 누가 어떻게 다친 걸까? 궁금증이 일어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참을 더 올라가서야 구조대원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구조대원 손에는 커다란 케이지가 들려있었고, 포획망을 들고 뒤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이것은 바로 TV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동물 구조 아닌가. 카메라는 없었지만 마치 내가 TV에 나오는 것처럼 신기했다. 무엇이 들어있나 물으니 오소리란다. 케이지 안을 기웃거려 봤지만, 창살 사이로 시커먼 등만 조금 보였다. 위험해서 잡은 건지, 보호동물이라서 잡은 건지 솟구치는 호기심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원들의 등을 흠뻑 적신 땀을 보고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오소리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정휘창의 『원숭이 꽃신』이다. 먹을 것이 많은 원숭이에게 오소리가 찾아와 꽃신을 선물한다. 맨발로 다니는 원숭이는 단단한 굳은살이 있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신발을 처음엔 거절한다. 하지만 오소리의 아첨에 넘어가 꽃신을 신어보고는 폭신폭신한 편안함에 빠져든다. 신발이 해지자 오소리는 또 선물을 준다. 신발에 익숙해진 원숭이의 발에서 점차 굳은살이 사라지고 결국엔 신발 없이 생활할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 오소리는 본심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잣 다섯 개로 시작한 꽃신 값은 급기야 잣 오백 개가 되고, 그 값을 치르지 못한 원숭이는 오소리의 집을 청소하고 개울을 건널 때 업어주는 노예가 되어 꽃신을 얻는다.
이 동화를 처음 읽었을 때는 순진한 원숭이를 속인 영악한 오소리에게 분노했다. 처음부터 돈을 받고 팔았다면 원숭이는 필요 없는 꽃신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 신발이 절실해진 원숭이가 스스로 만들고자 했으나,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제 욕심만 차린 오소리였다.
동화를 두 번 읽고는 원숭이는 순진한 피해자이기만 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욕심을 내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잘 어울린다는 아첨에, 내 위치에서 이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허영심에 넘어간 것이다.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지혜롭게 행동했더라면 선의를 가장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원숭이와 교활한 오소리가 머릿속에서 말다툼하는 중에 정상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아래 계곡에서 발만 담그고 가려고 했는데 팔공산 정상이라니,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옛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정상 표지석 앞에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한 컷 남기고 남편에게 툴툴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도 더 가져오고 먹을 것도 좀 챙겨왔을 텐데. 폭포까지만 간다고 하더니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나를 속였잖아. 목마르고, 다리 아파서 꼼짝도 못 하겠으니 업고 가라며 쫑알대다가 “이 오소리 같은 남편아”라는 말로 끝을 냈다. 줄곧 오소리와 꽃신을 생각하며 걸은 나와 달리 아무 생각 없던 남편은 갑자기 오소리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맘씨 좋은 아주머니에게 얻은 물로 빈 물통을 채우고 하산하는 길이었다. 풀 섶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멈칫하는데 지나가는 아저씨가 “청설모예요. 오소리는 데리고 갔으니.”라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아까 119가 데려간 오소리요? 구조대는 어떻게 왔을까요? 누가 신고를 했을까요?”
“내가 했어요. 오소리 구해가라고”
이런 우연이 있나.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사건의 전말顚末을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아저씨는 누가 물어주기를 바랐다는 듯이 이야기 폭포를 쏟아냈다.
아저씨가 오소리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털도 반지르르한 멋진 녀석이었다. 새끼 오소리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은 등산객들이 먹을 것을 줬고, 야행성인 오소리가 등산객이 많은 주말에는 등산로에서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다. 야생동물이 애완 동물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의 음식을 먹고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눈에서는 총기가 사라졌다. 아저씨는 오소리가 잘못될까 걱정되어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2주를 기다려도 구조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답답했던 아저씨는 오늘 오소리가 오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119에 직접 신고했다. 바위틈에 숨어있는 오소리를 본 구조대원이 아저씨에게 한 말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르신 저기 다람쥐가 발을 다쳤다고 칩시다. 그런 것도 우리가 다 구조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산짐승에게 아무 음식이나 주니까 저렇게 병에 걸렸지, 저 혼자 다친 겁니까? 그럼, 저 오소리가 등산객 가방을 뒤지고 사람을 공격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오소리를 구해서 데려갔다며 한숨을 쉬었다. 산의 주인은 저들이지 우리가 아니라며 야생동물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는 안내 현수막을 걸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고 했다.
오소리도 꽃신의 유혹에 빠졌던 것일까.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이 제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야금야금 달콤한 맛에 취했겠지. 발바닥의 굳은살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나에게 스며들고 있는 꽃신은 무엇일까? 내 안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또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검은 그림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의를 가장한 꽃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얼마나 튼튼한 굳은살을 가져야 할까?
아무튼 오소리 같은 남편 덕에 발바닥 굳은살은 확실히 생긴 하루였다.
『수필미학』 2023.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