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스러운
적막한 밤거리에서 길을 헤매던 사람이 경찰관에게 길을 묻자, 경찰관은 미소를 띠며 “포기해요, 포기하라고.” 하고 말하고는 몸을 홱 돌렸다. (「포기해라!」, 1936)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카프카-스럽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카프카적Kafkaesque.”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은 적은 없다. 카프카적 광기를 엿볼 수 있다는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복잡한, 불륜 이야기였고, 카프카적 분위기라는 영화는 잔혹한 장면이 가득한 공포영화였다. 혐오스러운 설정 때문에 읽지 않았던 카프카를 꺼내 들었다.
카프카에스크.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에서 사건의 개연성이나 인과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여주는 상황이 애초에 현실적이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까닭이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낯선 상황을 뜻밖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변신」(1915)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신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된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해하지만 그뿐이다. 출근하지 않으면 사장이 언짢아하리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이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독자이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닥뜨린 독자는 자기 문해력을 의심한다. 혼란스러움을 해결해 줄 무언가를 기대하며 읽다 보면 이야기는 끝나버리고, 독자는 소설의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벌레가 되어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주인공이 안쓰럽지 않다.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고 신선한 야채보다 상한 빵을 선호하는, 벌레의 ‘벌레-스러움’에 감상은 필요 없다.
독자가 마주하는 건 오히려 잔혹하리만치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노쇠한 부모와 어린 여동생에게는 일할 능력이 없었기에 그레고르는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생긴 빚을 갚아왔으며 동생의 학업을 위해 저축까지 하느라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5년 동안 결근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다닌 직장에서 딱 하루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 해고된다. 가족조차 그의 안위를 염려하는 사람은 없다. 벌레로 변한 그를 어떻게 대할지, 앞으로 겪을 재정적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지만 고민한다. 더욱이 그가 벌레가 되자 가족 모두 놀라운 생활력을 보일 뿐 아니라, 아버지가 적지 않은 돈을 모아뒀음이 드러난다. 주인공의 ‘뒤숭숭한 꿈’으로 시작한 소설은 그가 죽은 후 남은 가족이 ‘새로운 꿈’을 꾸는 것으로 끝맺는다.
사실 그레고르의 변신에 대한 가족의 반응은 현실적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레고르는 어쨌든 거대한 해충일 뿐이므로. 그도 알기에 가족에게 자기의 변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무저갱의 막막함을 느낄 때 숨고 싶어 하는 심정이겠지만, 결국 그조차 가족을 신뢰하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스스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도구로 치부했는지도.
경제적 이해관계로 연결된 가족, 이윤만을 따지는 기업의 실체가 「변신」에서 카프카가 보여주고자 한 전부는 아닐 것이다. 카프카는 답은커녕 어떠한 방향조차 제시해 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왜 변신하였는지(「변신」), 말과 마부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는지(「시골의사」, 1919),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창조한 낯선 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기에 현실을 참조할 수도 없는 이야기에서, 독자는 어떤 장면에서 웃고 어느 지점에서 감동이나 전율을 느껴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소설의 비현실적인 세계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세상인 양 다루어지기에 독자가 마지막에 발견하게 되는 진실은 인간 삶의 본질과 다름없다. 그레고르가 일상이라고 믿었던 현실이 허상에 불과했듯이,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야만 마주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 또한 전부일 수 없으므로 “진실보다 더 큰 비밀은 없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이 섬뜩한 이유이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을 구성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낯선 세계에 떨어져 알 수 없는 힘에 맞닥뜨린다. 주위에 그를 이해해 주는 이가 없으니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절박한 상황에도 주인공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맞선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방문 너머의 일을 궁금해하고 방을 벗어나고자 했듯이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힘은 자신이 이제까지 세상을 인식해 온 방식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없다. 마치 아버지가 던진 사과 조각이 몸에 박혀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그레고르처럼.
“나는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Ich bestehe aus Literatur, ich bin nichts anderes und kann nichts anderes sein).” - 1913년 8월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인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카프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페르디난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프리드리히 헤벨(Christian Friedrich Hebbel, 1813-1863)의 일기를 읽으며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이 공포에 질려 입구의 돌덩이를 치우려고 온 힘을 끌어모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 정수리를 일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1904년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 역시 누군가의 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쓰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카프카는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에서 일하며 직장 생활과 집필활동을 병행하였다.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지만 안전대책은 소홀히 하던 시절이었기에 부상자가 많았는데, 카프카의 업무는 산업재해 보상을 조사하고 평가하는 일이었다. 관료기관의 무자비함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비참한 생활상을 접하며 체험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작품에 반영했을 것이다.
사람을 생산을 위한 도구나 소모품으로 여기는 비인간화 현상을 보며 그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창조해냈다. 애정과 신뢰가 결핍된 인간은 ‘벌레’보다 나을 바 없고 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기에 존재가 소외되고 불안해진다. 소외된 개인의 막막함과 불안함은 카프카의 독특한 시공 개념을 통해 더 잘 나타난다. 산업사회에서 시간과 공간은 상품을 생산하고 경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수단이 된다. 개인의 경험이 담긴 주관적인 시간은 무시된 채, 사회에서 통용되는 객관적인 단위만이 의미를 지닌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다. 10분 거리가 열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하고(「일상의 당혹」, 1931), 버려둔 돼지우리에서 말과 마부가 나온다(「시골의사」). 멀거나 가까운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시간 또한 갑작스러울 만치 재빠르게 흘러버리거나 멈춰버린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레고르의 시간은 변신 이전의 기억과 맞물려 특정한 때와 연결된다. 반면 ‘벌레’로서 보고 듣는 그의 의식이 서술되는 후반부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모호해진다. 고통 속의 시간이 행복한 ‘순간’보다 길게 느껴지듯, 개인의 체험은 분과 초의 단위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카프카는 『성』 『소송』 『실종자』 등 세 편의 미완성 장편소설과 백여 편의 단편소설(미완성 포함), 산문과 시, 편지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형식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 짓기 어려우며, 산문인지 짧은 단편소설인지조차 불확실해 보인다. 그만의 스타일로 땅에 단단하게 뿌리박고 있는 듯이 보여도 언제 베여나갈지 모르는 「나무들」(1913)처럼 불안한 인간의 처지를 그려냈다. 카프카의 세계는 비현실적이고 불분명한 시간과 공간 개념은 몽환적이지만, 그의 문체는 간결하다. 대상을 관념화하거나 추상화하지 않으며 문장이 복잡하지도 않다. 건조하리만치 객관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였기에 그가 만들어 낸 낯선 세계는 낯설지 않다. 초현실적인 세계가 현실적이라 기묘하다. 알 수 없는 힘에 맞서야 하지만 이겨낼 수 없기에 오는 무력함, 비현실적인 사건 속에서 드러난 진실이 삶의 본질과 너무나도 닮았기에 느껴지는 섬뜩함, 뒤죽박죽으로 얽힌 시간과 공간까지, ‘카프카에스크’는 이 모든 의미를 아우른다.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이 모두 잠든 후에야 글을 쓸 수 있었던 카프카. 열 시간은 할애해야 제대로 된 글쓰기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럴 수 없었다. 변신하고 나서야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은 어쩌면 전업 작가를 꿈꾸었으나 생업에 종사해야 했던 카프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동생의 죽음을 경험하고 죽을 때까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족의 몰이해 속에서 고독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단지 여기-에서 떠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1936). 마치 이곳, 이 세계에서의 불안함을 없애주고 자유와 행복을 선사할 세계가 저 너머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스스로 자기 삶에서 도망치는 한 어떠한 해결도 없음을 카프카는 잘 알고 있었다. 신비하게도 말과 마부가 나타나 어딘가로 옮겨진 「시골의사」는 죽어가는 소년과 한 침대에 눕혀진다. 「변신」의 그레고르 또한 벌레로서의 생활에 적응하며 방을 벗어나려고 했으나 어쩌다가 변신했는지, 어떻게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카프카를 읽을 능력’을 잃었던 나에게 카프카가 도끼를 쥐여줬다. “포기해요, 포기하라고.” 벼린 도끼가 찍어내자 나의 혐오는 밑동까지 흔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거의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면서 프라하 시민의 1할만이 사용하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유대교 신앙은 갖지 않았던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빈의 요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친구인 막스 브로트(Max Brod)에게 일기와 원고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글들까지 모두 불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브로트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져버렸고 덕분에 프란츠 카프카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카프카-스럽다.
한국산문, 202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