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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할 것 없는 특별했던 그날    
글쓴이 : 노정애    24-06-25 07:13    조회 : 1,707

                 특별할 것 없는 특별했던 그날

 

                                                         노정애

 

 눈이 떠졌다. 오전 630. 옆지기를 깨우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왔다. 15살 된 강아지 두 마리가 나를 반겼다. “잘 잤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생수 한 잔을 마시며 오늘 할 일들을 떠올려봤다. 예정된 약속은 없었다. TV를 켜고 뉴스를 보니 국내외의 사건사고 소식이 어젯밤과 비슷했다.

  710, 텀블러 2개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실내복차림에 가벼운 카디건을 걸치고 슬리퍼를 끌면서 느긋하게 걸었다. 지하철 근처라 이른 시간에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근처 빵집에서 커피 두 잔을 샀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가니 단골이 되었다. 드셔보시라며 맛있는 빵 하나를 슬쩍 넣어주었다.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 사이를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으로 왔다. 커피머신을 선물해주겠다는 딸아이에게 필요 없다고 했었다. 이른 아침에 커피 사러 나가는 도심에서의 한가로운 여유를 기계와 바꾸고 싶지 않아서다.  

 남편이 일어났다. 커피와 빵을 먹으며 아침 뉴스를 봤다. 8시를 훌쩍 넘겨서 작은아이도 일어났다. 서두르는 사람은 없었다. 930, 둘 다 출근했다. 아침에 나온 그릇과 컵들을 설거지하고 가볍게 청소를 했다. 막간의 시간에 책을 읽고 가까운 대형마트에 가서 생수와 과일, 식재료들을 샀다. 나른한 오후시간, 생각이 자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서울 사는 남자와 부산 사는 여자의 장거리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결혼식은 부산에서 올렸다. 30년 전 일이다. 서울 장충동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친정아버지를 시작으로 시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며느리노릇을 졸업한 지 10년이 지났다. 그사이 아이들도 훌쩍 자랐다. 삶은 늘 치열했다. 고비도 많았다. 낙관적 성격의 아내는 10년 후 계획까지 꼼꼼히 짜두고 실행에 옮기는 빈틈없는 남편 탓에 가끔은 힘들었다. 치열했던 하루하루가 모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나고 보니 압축되어 마치 얼마 전 일인 듯하다. 젊음이 좋아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게 우리 부부의 공통된 마음이다.

 몇 해 전부터 2021년만을 기다렸다. 가까운 지인부부와 터키 여행을 계획했다. 딸아이는 그리스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적금까지 넣어가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남편이 유럽으로 크루즈여행을 가자는 약속도 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어온 팬데믹 상황은 꼼짝없이 우리를 국내에 가두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언제든 가겠지 하면서도 실망은 컸고 조금 우울했다. 주어진 하루를 감사하며 살자고 마음을 다잡는 중에 날아드는 지인들의 병고며 귀천(歸天) 소식. 실망이나 우울은 배부른 투정이었다. 그저 나쁜 소식만 없어도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되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결혼 30주년 기념일. 지난해까지 이 날은 특별했다. 결혼 전 아버지는 딸 생일과 결혼기념일은 꼭 챙기라고 예비사위에게 부탁했다. 이후 그는 약속을 잘 지켰다. 꽃이나 선물을 주고 멋진 식사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잊지 않았다. 덩달아 아이들도 이 날을 챙겼다.

 남편은 2021년은 모든 날이 30주년 기념일이라고 정초에 말했다. 매일 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자고 했다. 365일로 늘어난 결혼기념일. 가끔 여행을 떠나고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여행을 일주일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이 크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며칠 전부터 아무런 이벤트 없이 조용히 지나가겠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큰아이를 못 본지도 2년이 되어가고 온가족이 함께 모이는 그때 축하하자며 양해를 구했다.

 아침에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30년 동안 함께한 세월을 자축하며 서로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아이의 아침인사도 축하드립니다였다. 내게 결혼기념일은 잘 견딘 것에 스스로 다독이며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주문을 거는 날이었다. 식구들에게 감사해하는 날이기도 했다. ‘지난 1년 동안 수고 했어 정애야조용히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남편이 퇴근했다. 동네 밥집에서 된장찌개가 놓인 소박한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느리게 산책하며 집 주변을 걸었다. 아파트 정원에서 한참을 앉아 지난 30년을 곱씹으며 이야기 했다. 어느새 30년이라니. 청년의 남편은 반백의 중년신사가 되었고 생기발랄했던 경상도 아가씨도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지내자며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참 따뜻한 손이다. 아이가 늦은 저녁 귀가했다.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운동까지 하고 온 것을 보면 하루를 잘 보냈나 보다. 12시 즈음 잠자리에 들었다. 결혼 30주년의 기념일. 마음을 무겁게 하는 소식은 없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 오늘이 특별한 날이다.     


                                                                   한국산문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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