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노정애
집 근처에 용산 전쟁기념관이 있다. 육군 본부가 충남 계룡대로 옮기면서 1994년 6월에 개관했다. 대지 3,500평, 평화광장, 연못, 호국공원은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북문으로 들어가 숲 길을 걷다 보면 ‘평화의 시계탑’과 반구형 돔 위에 있는 ‘형제의 상’이 있다. 조형물들은 건물 2, 3층 높이로 크기에도 놀라지만 국군이었던 형 박규철 소위와 북한군이었던 동생 박용철 하전사가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사연 앞에 숙연해진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는 것 같다. 정문 중앙에 ‘6·25전쟁 조형물’이 거대한 높이로 서있고 실제 비석의 크기를 그대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와 ‘한국평화의 종 기념비’(DMZ의 녹슨 철조망과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수집된 탄피를 녹여 제작)가 동문 가까이에 있다. 이곳에 왜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지? ‘기념관’이라는 이름도 이상하다. 기념이란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쟁을 기념한다고? 여전히 어색하다.
그곳을 지나면 야외전시장이다. 대형 수송기, B-52D 폭격기, 북한군 이웅평 상위가 귀순할 때 타고 왔던 MIG-19, 장갑차, 고속정 등 7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었고 훈련용으로도 쓰였는데 ‘****년 퇴역하였다.’라고 설명되어있다. 전시실 앞에 있는 평화광장으로 간다. UN기와 6·25전쟁 당시 병력지원국 16개, 의료지원국 6개 국가의 국기와 기념비가 둥근 광장 둘레에 있다. 대한민국 부대 깃발과 파병한 부대기도 함께 있다. 간혹 기념비 위에 꽃이 놓여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얼마 전에는 벨기에 기념비에 한 송이 흰 국화가 비를 맞고 있었다. 그렇게 둥근 광장 몇 바퀴를 돌면 가벼운 산책이 끝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런 여유를 즐겼다.
‘튀르키예 국방부, 전쟁기념관에 군복 등 추가 기증’ 4월 1일 인터넷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산책코스로 마당만 돌았는데 이런 기증품들이 전시되는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전시관을 둘러본 기억이 없다. 나는 전쟁을 TV나 영화, 책, 역사 교과서에서만 봤다. 친정어머니는 중학교 때 전쟁으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장사를 하고 학업을 접은 어머니는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을 맡았다. 서울에 살던 시어머니는 사범대학 학생이었는데 피난지 부산에서 나이도 어린 시아버지와 서둘러 결혼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전쟁만 아니었다면’이 그분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내게 전쟁은 부모님세대의 이야기였다.
입장료는 무료다. 3층 규모의 전쟁기념관은 7개의 실내전시실과 어린이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내전시실 입구는 2층인데 정면에 ‘호국 추모실’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합니다.’ 라고 쓰인 석판과 전사자 명부가 비치되어있고 양쪽으로 촛불이 켜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에서 내린 한 줄기 빛이 반구 중앙의 물과 만나는 <창조>라는 대형 조형물이 있는데 천장의 작품에도 의미가 담겨있다. 전쟁 속 무사들의 모습과 전투장면을 묘사한 벽화와 기록화가 있는 ‘호국의 길’을 지나 1층으로 간다.
1층 로비 중앙에 거북선이 있다. ‘전쟁 역사실’은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 우리나라가 치른 큰 전쟁을 시대별로 전시한다. 고구려, 발해의 위용,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임진왜란 등 전쟁의 역사를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도 표현했다. 그때 쓰였던 무기와 군복, 전쟁과 관련된 기록물도 많다. 왜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전쟁 역사박물관이었다. ‘대형 장비실’에는 실제 사용되었던 비행기와 탱크, 이승만대통령의 의전 승용차, 소련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리무진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2층과 3층은 ‘6·25전쟁실’과 ‘유엔실’, ‘기증실’, ‘해외파병실’이다. 남한 침략 암호명은 ‘폭풍’이었다. 폭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 1일 낙동강까지 몰아쳤다. 벽에 걸린 한반도 지도는 낙동강을 앞에 두고 온통 붉은색이다. 10%만이 흰색이다.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산은 부모님이 사셨던 곳과 가깝다. 그곳이 무너졌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국군과 유엔군, 경찰, 학도병, 노무자, 여성 등 모든 국민이 함께 사수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바뀐다. 지도의 하얀 부분이 조금씩 넓어졌다.
낙동강 전투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디오라마(3차원 실물 모형)에 음향까지 더해져 잠시 전장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런 디오라마는 피난 가는 행렬, 피난지에서 노천이나 천막에서 수업을 받고, 담장 너머로 수업을 엿듣는 모습도 있다. 피난민의 모습에 시어머니가 겹쳐지고 수업을 엿듣는 아이가 친정어머니 같았다.
중공군 개입 배경과 그 이후의 전투상황, 흥남철수를 가능하게 했던 장진호전투, 1.4후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1951년 3월 15일 서울 재탈환, 그리고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유엔은 처음으로 유엔군을 결성했다. 3층 ‘UN실’에는 참전국인 16개 전투부대 파병국(미국, 영국, 튀르키예,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필리핀,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디오피아, 프랑스)과 다섯 개 의료부대 지원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의 활동을 소개하며 각 국가별 무기, 군복, 계급장, 훈장과 참전용사 유해안장, 그들의 사진, 일기장 등 전쟁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얼마 전 보도를 통해 봤던 튀르키예 전시실이 비교적 넓게 있었다.
3년 1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약 194만 명이 참전해 40,790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전사자의 일부는 부산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는데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 곁에 묻히길 희망한 참전군인들과 전사자의 아내도 합장을 원해 타국의 하늘아래 안장되었단다. 그들이 지켜낸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 같았다. 많은 사진들과 물품들이 전시된 것을 보고 출처가 궁금했는데 기부나 기증에 의한 것이 많았나보다. 1천여 명의 기증자 이름이 적힌 명패가 벽처럼 세워져 있다. 지금도 기증과 기부는 계속 되고 있다.
전시관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영어해설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따로 조용히 둘러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전에 신청하면 영어나 일본어 해설을 들을 수 있단다. 그들 중에 꽃을 두는 사람도 있으리라. 전시관을 나와 양옆의 회랑으로 갔다. 그곳에는 6.25전쟁과 베트남전 등에서 전사한 국군, 경찰관, 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가 있다. 명비 아래에 놓인 꽃이 간간이 보이고 묵념을 하는 외국인들도 이었다. 한국군 137,899명, 유엔군 40,790명, 민간인 373,599명 사망, 부상자 229,625명, 납치 및 행방불명자 387,744명. 죽어서도 이름을 찾지 못한 무명용사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전쟁을 부모님 세대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올해 7월 27일은 휴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상태다. 서로를 비방하고, 미사일을 쏘고,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협정을 맺었던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7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언제쯤 정전협정을 맺고 통일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다음 산책길에 무명용사비 앞에 흰 국화꽃 한 송이를 올렸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내 삶의 여유로운 시간들이 있음을 감사드리며 오래도록 묵념을 했다.
한국산문 202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