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베이스/김주선
“왜 아무 말도 않죠?”
대여섯 명 이상 모인 자리라면 흔히 듣는 질문이다. 접시가 깨질 정도로 수다스러운 모임에서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 매번 귀만 활짝 열다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괜찮다. 뾰족한 새의 부리로 종알거리는 그들의 입술을 관찰하는 것이 더 좋다.
발랄한 피아노처럼 모임을 주도하는 이도 있고, 풍부한 선율을 자랑하는 첼로나 기교를 뽐내는 바이올린 같은 이도 있다. 모두 저 잘났다고 자랑 삼매에 들지만, 모임의 합만 맞으면 그 또한 나쁘진 않다. 관악기의 고성 뒤에 숨어 재미도 없고 무뚝뚝한 베이스처럼 앉아있는 나 같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적마다 「플루트 연주자」를 쓴 피천득은 이렇게 위로해 주곤 한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한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의 연주를 하는 것이다”라고. 무음의 연주라는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는 줄 몰랐다. 성량은 작고 말수는 적지만,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의 입술과 제스처에 열중하면서 마음속으로 리듬을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해 시월, 대학로에서 열리는 모 여성백일장에 문우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날 시제 중 하나가 ‘두통’이었다. 나는 시 부문에 참가했지만 잘 풀리지 않는 문장 때문에 일찌감치 쓰던 원고를 접고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두통을 핑계로 종로까지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실은 한 명도 입선자가 없었다. 낙선자들이 의기투합해 들른 곳은 재즈카페였다. 활을 쓰지 않고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하는 더블베이스 라이브는 처음 들었다. 칵테일 한잔에 멜랑코리하게 취해오는 기분 탓인지 현을 튕겨대는 놈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누구도 그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피아노 곁에서 퉁퉁대는 녀석의 소리를 들었다. 실내악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악기였다.
쉴 새 없이 애드리브를 쏟아내는 재즈 가수를 쫓아가느라 베이스 연주자는 바닥을 뛰어다니는 윗집 아이처럼 숨이 가빴다.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안고 빠른 대목의 악장에서 쩔쩔매는 연주자의 유머”를 그래서 피천득은 부러워했던 걸까. “야구팀의 외야수처럼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의 역할”을 그토록 잘 묘사한 작가는 없었다. 더블베이스란 낮은 음역의 베이스보다 더 낮은 음역을 뜻하는 ‘최저음’이란 뜻이기도 하다. 두통을 해소할 만한 경쾌한 소리는 아니지만, 활을 집어 던지고 줄을 튕겨댈 땐 얼마나 낮은음자리에서 둥둥대는지 객석까지 진동을 느낄 정도였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처녀작 『콘트라베이스』는 모노드라마 형식의 독백을 쓴 작품이다. 연극 무대에 많이 올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권에서는 ‘더블베이스’ 혹은 ‘베이스’라 불리고 독일어권에서는 ‘콘트라바스’라 불리는 악기 이름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이름으로 2020년 이후는 잘 쓰지 않는다. 누구보다 화려한 무대에서 연주하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베이스 연주자의 위치나 역할을 우리 사회에 빗대어 쓴 단편이다. 스스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며 공무원이란 국립단원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존재감 없는 자신을 비하하고 분노에 차기도 한다. 아름답지도 않은 소리에 시답잖은 악기라서 작곡가들도 외면하는 악기라고. 바이올린을 배우려 했지만, 여건이 안 되어 콘트라바스를 하게 되었다고. 높은음자리에서 출렁거리는 바이올린이나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음색이 수려한 여러 악기를 받쳐주는 보조 악기라는 외로운 자신의 존재를 푸념하듯 토로했다.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자조적인 심리묘사가 맥주 한잔에 쏟아내는 객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불안한 현대인의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향적인 성격에 생각이 많은 소심한 인물로 사랑조차 짝사랑으로 끝나는 소극적 태도가 마치 나를 닮은 듯 연민이 들었다.
연주하는 음의 개수만큼 봉급이 책정된다면 단연 피아노의 돈주머니가 제일 클 것이다. 악단 자리는 인기나 성적순이 아니다. 단원은 연주하는 악기와 무관하게 모두가 같은 봉급으로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을 알기에 무음의 파트가 길다고 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작가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콘트라바스를 통해 이해시키려 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만약 쥐스킨트의 베이스 연주자가 피천득의 플루트 연주자를 읽는다면 나처럼 위로가 되었을까.
누구나 다 주목받는 존재가 될 수 없기에 각자 삶의 위치에서 자기 몫의 역할수행을 하면 되지, 남을 뛰어넘고자 과시하고 잘난 척하지 말란 뜻이리라. 콘트라베이스, 바순, 팀파니, 플루트 같은 연주자처럼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제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적 의미로 읽혔다. 잘났든 못났든 이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서 코끼리가 뒤뚱거리며 왈츠 추는 춤사위를 더블베이스만큼 표현한 악기를 본 적이 없었다. 키스하듯이 목을 끌어안고 허리를 구부린 채 열심히 활을 문지르는 연주자를 볼 때, 나도 모르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품위 있는 현絃의 족속族屬이라고 해서 모두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된다면 누가 육중한 코끼리를 춤추게 할 것인가.
나의 자리가 맨 뒷자리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가 안 들릴지라도 인간관계에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람, 가만 앉아만 있어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런 정서를 나는 좋아한다.
한국산문 2024.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