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신념
노정애
오랜만에 받아보는 우표를 붙인 손 편지다. 갈색의 편지봉투에 동글동글하고 단정한 예쁜 손 글씨로 쓰인 우리 집 주소와 수취인이 ‘선생님께’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도 있다. 요즘 보통우편 보낼 때 붙이는 우표 요금이 430원이었구나! 인도차이나 원숭이와 말레이 철갑산이 그려진 우표가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봉투입구에는 모네의 「지중해 마을」 그림스티커가 붙어있다. 편지를 앞뒤로 돌려보며 무슨 내용이기에 이렇게 마음을 담아 보냈을까? 받는 이가 ‘선생님께’면 광고성 편지임에 틀림없는데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개봉했다.
종교단체에서 보냈는데 몇 주 후에 열리는 행사 안내장이었다. 직접 만나 뵙기를 바란다는 손 편지와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한자 한자 쓴 정성이 느껴져 날짜와 장소를 확인하고 편지를 꼼꼼히 읽었다. 시어머니가 믿었던 종교였다. 이 편지를 봤다면 아주 좋아하셨으리라.
어머님의 종교를 알게 된 것은 결혼식 후 폐백을 드리면서다. 당신은 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시댁 식구들의 작은 소란이 지나자 아버님 옆에 큰 고모님이 앉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새색시에게 “엄마의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 새신랑은 말했다. 친정 식구들에게는 시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절을 받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어머님의 믿음에 대해 들었다. 절을 하지도, 받지도 않고, 생일이나 기념일도 안 챙기며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특히 자녀를 군대에 보내지 않는데 남편 형제 넷은 모두 군필자다. 식구 중 엄마만 믿으며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단다. 나는 종교가 없고 남편은 간간이 절에 간다. 당신의 믿음을 존중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결혼 다음해인 5월 큰아이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을 때 시어머니가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의사는 2기라며 당장 수술 날짜를 잡자고 서둘렀다. 수술시 수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사에게 어머님은 수혈을 받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냥 수술을 받자는 가족들의 간곡한 설득이 며칠 이어졌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신은 의사에게 수술하면 몇 년을 살 수 있냐고 물었다. “경과를 봐야하지만 5년은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 하면 3년도 힘듭니다.” 어머님은 고작 2년에 ‘종교적 신념’을 버릴 수 없다며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했다.
어머님의 팬티에는 작은 주머니가 덧대어져 있었다. 그 속에 항상 넣고 다니는 코팅이 된 작은 종이에는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받지 않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가족들은 “당장 죽는다 해도 수혈은 받지 않겠다.”는 당신의 신념을 받아 들였다. 간간이 만삭의 나를 보며 “내가 저 아이 돌을 볼 수 있을까?” 했다. 가족들 앞에서는 의연했지만 본인이 제일 두려웠으리라. 우리는 한약을 지어다 드리고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챙겼다. 암에 좋다는 약수를 뜨기 위해 천안에 수시로 갔다.
나는 축하 행사나 기념일을 좋아한다. 그런 날이며 모든 가족을 불러 모은다. 왁자지껄 떠들고 한바탕 웃으며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나게 먹어주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그러니 시부모님이나 남편의 생일, 아이들의 생일까지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다. 시어머니가 기념일을 챙기지 않아도 나와는 무관했다. 가까이 시댁이 있으니 어버이날이나 크리스마스까지 파티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척 분들까지 초대해 신나게 놀았다. 어머님의 퇴원 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열심히 기념일을 챙기고 틈만 나면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가족이 모이면 누구보다도 즐거워하시는 어머님을 보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돌이 지났다. 2년 뒤에는 둘째도 태어났다. 어머님은 살도 찌고 더 건강해 보였다. 집안일과 종교 활동으로 매일 매일 바쁘고 활기차게 움직였다. 아이들 입학식, 졸업식, 재롱잔치, 체육대회 같은 크고 작은 행사에 시부모님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루지 않았다. 온 가족이 여행을 가고 맛 집을 찾아다니며 휴일이면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쉬다왔다.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5년을 넘길 즈음부터는 오진이었거나 완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간간이 들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어머님은 다시 입원했다. 암은 조금 더 진행된 상태였다. 비교적 건강해 보였는지 어머니를 기적의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수혈거부에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의사는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길고 힘든 치료는 잘 견뎠지만 약해진 체력과 떨어진 면역성은 몸 여기저기에 이상 신호를 보냈다. 일 년에 몇 차례씩 입 퇴원을 반복했다. 퇴원 후 기력을 회복하면 일상생활로 돌아갔지만 매년 병원 찾는 횟수가 늘었다.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다. 치매로 당신의 기억은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갔고 목숨보다 소중했던 종교도 잊었다. 그즈음 암이 전이된 부분이라도 절제해야 통증을 줄인다는 의사의 말에 아들들은 보호자의 권리로 수혈받는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당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를 짓는 것 같았지만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자고 했다. 덕분에 1년여 통증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곳으로의 전이는 계속되었다. 결국 패치형인 마약성 진통제를 붙였다. 한 장, 두 장, 늘어났는데 나중에는 여러 장을 붙여야 견딜 수 있었다. 어머님이 우리 곁을 떠나던 날은 “돌이나 볼까?” 했던 아이의 수능 일주일 전이었다. 당신의 종교적 신념과 강한 의지가 19년의 시간을 허락했으리라.
나는 여전히 식구들을 불러 모은다. 우리 집에서 시부모님 제사를 모신다. 어머님의 종교적 신념과는 무관하다, 참 못 말리는 며느리다. 명절과 기일에 가족이 함께 모여 그분들을 추억하고 즐겁게 지내면 행복하다. 이런 우리들을 본다면 살아생전 함께 해 주셨던 것처럼 틀림없이 기쁜 마음으로 봐주시라. 당신이 초대장을 보낸 것 같아서 반갑다. 편안히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으셨나 보다.
<월간문학>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