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는 ‘사철가’ 가락을 타고
국화 리
캘리포니아 사막에 겨울비가 쏟아지고 있다. 가뭄으로 애타게 기다리던 반가운 비이기도 하고 코로나 사태로 어두웠던 2021년을 보내는 시원한 비이기도 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 보니 조국 떠나 노마드로 살아온 사십 여년의 인생이 보인다. 그 삶은 내가 선택한 삶이었지만 문화의 충격과 언어 장벽은 나를 집 밖으로 나서는 걸 두렵게 만들었다. 살아갈수록 그들과 동화되기보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기만 했다. 내 모국어로 말하는 친구들을 만나 마음을 주고받는 삶이 그리웠었다.
나의 이민생활의 후반부는 한인타운에서 새로운 인생계획으로 살고 싶었다.
어느덧 인생의 겨울이 되어 돌아보니 빈 수레처럼 허하기만 하다.내 민족의 가락 ‘사철가’가 입 속에서 흘러나온다.
판소리를 배울 때 처음으로 익혔던 단가로 부를수록 그 사설내용이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
오늘 같은 날은 제격이어서 겨울비를 반주 삼아 불러보았다.
‘이산 저산 꽃이 피면/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 만은/ 세상사 쓸쓸 하구나./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 날 백발 한심허구나….’
나의 뿌리를 남가주로 옮겨 심었을 때는 내 인생의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혼자 꽃도 피지 않은 봄을 보냈지만, 남편이 있는 미국은 햇살 좋은 여름날 장미꽃밭 같았다. 그때는 ‘고생 끝에 낙’이라는 옛말을 믿었고 내 인생의 뒤편엔 그늘도 있으리라는 걸 몰랐다. 내 남편도 ‘당신의 인생은 늘 싱싱하고 향기로운 꽃밭’ 이라 말했었다. 그는 늘 그 말을 반복했고 나는 믿었었다.
자연의 계절은 때가 되면 다시 찾아와서 맞이하는 기쁨을 주지만 인생의 사계절은 가버리면 끝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살았다.
(…)녹음 방초 성화시라/ 옛 부터 일러있고,/ 여름이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계 없을 쏘냐. /한로 삼풍 요란해도 계절 계를 굽히 잖는 /한국 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 월백 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여름이 가버려도 가을 단풍은 이산 저산에 불이 난 듯 빨갛다.
나의 인생의 가을은 잎이 떨어져 흩어지고 앙상한 가지의 느티나무였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혼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과 벗하며 살게 될 줄이야.
숨이 차게 달린 내 인생의 목적지가 있었던가. 남들이 달리니까 그 뒤를 따라 달리지 않았나. 누구에게든 짐이 되지 않는 삶이 되고 싶어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지는 않았는지. 누구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진 않았는지도 생각해 본다.
‘사철가’ 가락은 겨울비를 타고 흐르며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내 서러움도 얹어서 빗소리와 음을 맞춘다.
사철가는 일러준다. 겨울이 되어도 백설로 뒤덮인 산천이 우리의 벗처럼 보인다니, 내 인생도 그렇게 보일까.
‘노세 젊어 놀아 /늙어 지면은 못 노느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이 허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 /어떤 친구 벗님 모여 앉아 한잔 더 먹세(...) ’
인생의 가을이 되었을 때 나는 외발로 서서 살아야 했다. 그 외로움과 싸움에서 나는 밖으로 나돌았다. 노래방이 유행할 때는 친구들과 방이 흔들릴 정도로 놀았으니 “너 잘했다,” 라고 사철가는 말해주지 않을까. 외기러기로 살아도 품위 있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날개에 힘이 빠져있었던 것도 후에 알았다. 부부동반모임은 멀어져 가버렸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우리 조상의 건전한 삶의 멋, 망중한의 풍류가 나에게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배운 사철가는 내 판소리 선생 서훈정의 버전으로 다른 명창들이 부르는 것과 다르다. 길든 버전으로 내 마음대로 부르는 재미가 있다. 애드리브도 넣어 부를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떤 사설을 넣을까.
“오 호 친구 벗님,/ 그대여 듣지 못하였는가./ 너를 부르는 나의 쉰 목소리/
오늘은 귀를 기울이시게나/ 어 허, 응답하시게나.”
산타모니카 피어에서 그와 함께 바라보던 밤바다는 시커먼 빛깔로 출렁거리기만 했었다. 그때 그 침묵은 불안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서 바로 받았다.
“어 나야, 친구들이랑 있어. 좀 있다 들어갈게.” 내 남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며칠 후에 그가 전화를 했다.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웃었다. 우리는 잠간 불어왔던 샛바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떠나갔지만 오늘은 사철가에 얹어 불러보고 싶다.
빗소리는 볼륨이 커지더니 나의 젖은 음률을 삼키고 있었다.
소리를 할 때 득음을 하여 한을 넘어서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다고 한다. 득도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해탈의 경지이니, 득음도 그런 경지인가 보다. 나는 득음을 하지 못한 채 소리 교실을 나왔었다. 언젠가 득음을 하여서 한을 넘어서는 사철가를 부를 수 있을까.
십 수 년 소리 잃은 소리 북과 춘향전 심청전 책이 들은 가방도 있다. 짐 정리 할 때 남긴 것은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인가 보다.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다 해도/ 임수수며 격석화여/ 공수레 공수거를 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가(...)’
아침이슬처럼 사라질 우리네 인생. 이처럼 빈손으로 갈 인생인데 곡간을 채우려 허송세월 말고 우리 함께 한잔하면서 삶을 즐겨보자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나그네 인생들을 불러 모아야겠다. 한마당 큰 판을 깔고 사철가를 제대로 불러보면 어떨까.
수고하고 짐 진 노마드 인생들이여!
우리모여 손에 손 잡고 어깨를 부딪쳐 보자.
겨울비는 ‘사철가’ 가락을 타고 종일 로스앤젤레스 내 창가에 머물고 있다.
(2021년 끝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