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길이야 어디로든 향하면 그뿐
그곳이 어디냐고 묻지를 마라.
누구나 한번쯤은 저 선운사에 들러
해마다 피고 지는 생의 絶命을 노래하며
떨어진 花頭의 귀퉁이나 쓰다듬어라.
‘이게 봄이야 여름이야.’
뜨거운 햇볕이 타는 듯하다. 에어컨을 켤까 망설이다가 대신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거세게 밀려든다. 아예 좁은 차에 동승해 같이 가자 할 기세다. 그건 곤란하다며 도로 닫는데 노래 한 곡 흘러나온다.
'wild fiowers'
좋지! 야생의 것들에게서 얻는 에너지란 얼마나 강렬한가. 갇히지 않은 것들은 모두 야생이다. 그 야생의 실체를 찾아 마냥 달려 나간다. 선운사도 거기 있었던가.
이미 수행으로 겸손해진 나무들의 인사와 거센 흙먼지 바람이 열렬하게 맞이한다. 그토록 오랜 소문을 돌아 이제야 그리운 선운사에 간다. 불어라 바람아 미친 봄바람아. 삶의 불안과 긴장의 한 올까지 사정없이 벗기던 신명과 환대에 취해 저 깊고 아득한 세계로 나도 구경이나 좀 하리.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짧지 않은 길을 따라가자니 곧게 사열한 나무들이 갓 풀어놓은 물감들이다. 방금 염색한 연두빛 머리를 사정없이 흔드는 푸르고 그늘 좋은 나무 아래는 물건 파는 아낙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다.
어디든 삶의 징한 흔적들은 있다. 아니 인생이란 게 삶의 긴 흔적 아니더냐. 몇 개씩 붙여놓은 플라스틱 의자엔 곡식 자루들이 팡파짐하게 얹혔고 그 뒤로 엉성한 가판대엔 또 말린 산나물들이 한 움큼씩 놓여 있다.
소박하고 질박한 한 줌의 꺼리. 얌전히 담긴 저 양식 속엔 키우고 가꾼 누군가, 한 생의 무게마저 더했으려니. 먹고 사는 일처럼 거룩한 게 어디 있을까. 비워내고 들어서야 할 절 입구에서 애틋한 연민 한 줌 되레 담게 생겼다.
사는 동안 우리가 제일로 즐기는 건 끝도 없는 욕심으로 기도하는 일이다. 나를 빌고 너를 빌고 우리를 빌며 무엇을 그토록 바라는 건지 하나씩 둘씩 올려놓은 작은 돌들이 시간만큼 뾰족하게 층층 탑을 쌓았다. 거센 바람에도 끄덕 않고 뙤약볕을 이고 있다. 만 가지 형상으로 엉킨 욕망들이다. 엎드려 빌던 우리네 마음 닮은 불쌍한 돌 중생이여, 독한 분신들이여.
사찰의 입구쯤에 세운 구름다리는 현세의 묻은 때를 털어내는 곳이란다. 그대와 내가 지은 무수한 죄업들을 하나씩 둘씩 고해하는 곳. 바람에 씻겨 열리던 푸른 봄날처럼 남은 욕심도 다리 밑 흐르는 개울에 던져버리란다. 그저 비운 주머니에 겸손이나 넣고 시작을 알 수 없는 수행으로 이미 도(道)가 된 나무와 풀들의 향기나 맡으면서 걸으란다.
전각의 어깨쯤에 높게 매단 현수막을 올려다보다가 그림자도 말리고 말 저 햇볕에 정신이 그만 아득해진다. 땀을 닦는 이들의 얼굴이 버짐처럼 얼룩덜룩하다. 계단 하나 오를 때마다 발에 걸린 상념들이 마침내 대웅전 턱을 넘자마자 와당 퉁탕 쏟아져 내린다.
'스님, 스님 말씀 좀 여쭤요.'
'여기가 어딘가요. 속세가 넘지 못할 선경인가요?
'여기만 있으면 깨달을까요. 무겁던 생의 짐도 덜어지나요? '
'그렇게 쉽게야 얻는 게 아니려니 그러니 사람들이 예 와 못 사는 거지.'
'그러면 오던 길 돌아갈까요. 흩어진 꽃잎이나 세며 갈까요......'
한적하고 이름 없는 암자 하나 주어진다면 그곳에서 한 달만 살고 싶다. 가식도 욕심도 다 내려놓고 자유라는 이름조차 나비 등에 던져주고 꽃인 냥 풀인 냥 살아보고나 싶다.
밤이면 어둠이 윤을 낸 작은 암자에 아무렇게나 대자로 눕고 싶다. 어둡고야 떠오르는 별들의 전설이나 뒤지며 지나가는 바람의 넋두리나 귀동냥하다가 풀잎에 이슬 맺히는 아침이 올 때까지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고 싶다. 그렇게 딱 한 달만 살아보고 싶다.
복전의 힘이 어디 불심의 힘만큼이야 할까. 큼직하게 써 붙여 만든 불전 함엔 그래서 동전 몇 닢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목례가 담기지만 부처는 그래도 한 가지로 웃으며 받고 계시다. '나누는 자비 따뜻한 손길'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햇살의 무게까지 기립한 불심으로 어깨에 멘 대웅전 기둥들이여. 오늘 이곳을 지나던 인연 한 자락으로 그 꼼짝없이 붙박인 노동과 고행을 어루만진다.
절간을 돌아나오는 뒷덜미를 무언가 조금 더 붙잡는 듯하지만 아쉬운 채로 떠난다. 끝물처럼 여기 저기 엎어진 동백의 화두 앞에 먼저 간 시인의 핏빛 노래나 흥얼대며. 길은 멀고도 끝이 없으니 닿으면 떠나고 싶은 우리, 어딘들 온전히 머물 수 있으랴.
맑은 물 한 바가지에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돌아서는데 눈부신 햇살이 쨍하고 우리를 비켜간다. 용서를 간청한 허술한 기도 하나 쏜살같이 그 위로 올라탄다. 뜨겁고 아득한 이 봄날, 나는 정녕 선운사에 왔다 가기는 하는 것이냐.
< 에세이플러스 2006 /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