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가 되는 시간/ 김주선
통나무를 켜는 기계톱 소리가 요란하다. 남편과 함께 지인이 운영하는 목재소에 갔다. 사무실에 앉아 커피 한잔을 얻어먹으면서 톱 가루가 날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때 트럭 한 대가 목재소 정문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인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벌목된 나무가 번호표를 달고 죄수罪樹도 아닌데 얌전하게 포승줄에 묶여서 실려 왔다. 낙엽송 우거진 숲 냄새가 났다. 생목生木에서 흐르는 푸른 피의 냄새는 비릿하면서도 청량감이 있어 단번에 고향 숲속으로 나를 안내하는 듯했다.
목재를 다루는 일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목공들은 말한다. 습도와 온도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길 반복,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 색깔도 변하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나무는 변덕이 심하고 예민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쓰임 있는 판재로 재가공하여 건축이든 가구든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드는지 설명하느라 목재업자는 침이 마른다.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는지 켜켜이 쌓인 폐목재창고에서 남편은 가져도 되느냐고 지인께 여쭈었다. 종종 얻으러 갔던 모양이었다.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거나 쓸모없어 버려진 목재였다. 황소의 눈알처럼 박힌 까만 옹이가 매력인데 ‘옥에 티’라니, 의아했다.
오래된 시골집 나무 기둥에 박힌 점박이 무늬는 얼마나 보기 좋던가. 옹이를 두고 어느 시인은 흉터라 부르지 말라, 상처라 부르지 말라 했다. 나무의 생장 과정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해도, 더러 나뭇가지가 꺾이고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흉터 자국들이다. 오히려 아버지는 단단히 박힌 옹이 때문에 기둥이 뒤틀리지 않고 대들보를 받쳐 준다며 대패질로 상처를 어루만져 멋스러운 무늬를 만들었다. 판재로 얇게 켤 경우 성질이 다른 옹이가 빠지는 일도 있지만, 통나무를 사용하는 경우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아 일부러 굳은살이 많은 것으로 골라 기둥을 만든다. 비록 흉터일지언정 어느 집 기둥으로 쓰일지, 불구덩이의 장작으로 쓰일지는 숙련된 목수만이 아는 일이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일 것이다. 남보다 늦은 2차 성징이 왔다. 한여름, 봉긋 솟은 젖가슴이 뭉근하게 아파 브래지어를 하고 학교엘 갔다. 가슴이 더 자랄 때까지 입으라고 그랬을까. 엄마가 시장에서 큰 크기로 사 오는 바람에 교복 속에서 헛돌았다. 그걸 안 뒷자리 친구가 끈을 잡아당겨 자꾸만 후크(hook)고리를 풀어지게 했다. 친구들 몰래 화장실에 가 다시 고리를 잠그고 나오길 반복,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참으면서 여름학기를 보냈다. 요즘 말로 학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친구는 뽑아버리고 싶은 내 기억 속 옹이였다.
마흔 넘어 나도 꿀릴 게 없던 시절, 어느 동창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젊은 나이에 사랑과 믿음이 어찌나 충만한지 교회 권사가 되어있었다. “내가 그랬다고?. 설마 다른 애랑 착각하는 거 아니니?.” 제 딴에는 장난이라 기억 못 하는 것인지 되려 날 보고 착각이랬다. 오물통에 쏟아 붓는 내 입만 더러워졌을 뿐 그녀의 품격에는 망신살 하나 안 생겼다. 내 삶에 박힌 크고 작은 옹이가 얼마나 수두룩한지, 그중 하나가 네 것이라 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청정지역에서 자란 나무처럼 어떻게 재단해도 완성품이 나올 목재처럼 말끔하게 보였다. 취미로 목공을 하는 남편 곁에서 그 정도의 목재라면 나도 볼 줄 아는 편인지라, 나이테가 반듯하고 결이 좋을 뿐, 정이 안 갔다. 그녀의 흠 하나 없는 삶이 최상품일지언정 괴롭힘인 줄 모르는 그 기억은 정말 밉상이었다.
목재소에서 주워 온 폐목으로 커피믹스 보관함과 찻잔 진열용 선반을, 남편과 같이 만들었다. 땔감이 될 뻔한 판재 표면을 사포로 문질러 불에 그슬렸더니 얼룩덜룩 무늬가 생겼다. 오래 묵은 나무처럼 예스럽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바니쉬로 광칠하고 왁스로 코팅 마감을 했더니 그럴싸하다.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을까. 새삼 검버섯처럼 핀 내 안의 상처 자국을 보며 노트북을 열고 톱을 켜기 시작했다. 쐐기처럼 단단하게 박힌 옹이 때문에 아무 구실도 못 한다면 나는 땔나무가 되었으리라. 나는 가끔 잠망경을 쓰고 어린 날의 얼룩이나 흠, 굳은살 같은 흉터를 꺼내놓고 내 삶을 엿본다. 내가 쓰는 수필의 소재로 얼마나 흥미로운가. 치유의 글쓰기라 해도 좋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옹이 없이 자란 나무가 어디 있느냐며 스스로 보듬었다.
목공 일을 하다 보면 큰 옹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을 피해서 재단할 때도 있고, 또 자잘한 옹이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용도에 따라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 나이테도 잘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목재보다는 조그마한 티눈이라도 품고 있는 쪽이 더 정이 간다고 남편은 DIY 가구 소품을 제작할 때 염두에 두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옹이박이 때문에 휘고 뒤틀려 선반 위에 놓인 꽃병이 중심을 잃고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크게 괘념치 않았다.
자판 위에서 톱 가루를 날리며 나의 문장들이 다듬어지고 있을 즈음, 상처가 무늬가 되는 시간을 견뎠을 내게 모바일 청첩장 하나가 도착했다. 이제는 생生의 허물 하나쯤 그녀의 등껍질에도 새겨진 걸까. 매일매일 나를 위해 응원하고 기도를 해준다니 그 어떤 사과보다 그녀의 위로와 지지는 진심처럼 보였다. 마치 내 안에서 옹이 하나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이윤훈 시인의 시구처럼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옹이구멍’으로 참으로 아롱진 무늬를 보았던 게다.
한국산문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