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집
국화 리
1960년대 말부터 한동안 유행했던 팝송 「카사 비앙카」(White House, 「언덕 위의 하얀 집」)를 기억하는가. 비키의 아련하고 애잔한 음성으로 귓가에 머물던, 패티김과 정훈희도 번안 가사로 불러 인기를 누렸던 곡이다.
어느 동네에 하얀 집 한 채/ 낡고 무섭고 무너져 가는 집/ 그 집을 다시 세우고 싶어요…
처녀 국화는 노래의 제목을 빌려 금호동 언덕 위에 양장점 「하얀 집」을 열었다. 내 나이 이십 대 초반, 친구들은 대학 졸업반으로 미팅과 데이트에 열중했다.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다. 학교 교사로 일했지만, 엄마를 위해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작은어머니 집에서 엄마와 함께 분가하는 일이었다.
대식구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늘 신음으로 살았다. 집안의 수장인 날 선 시어머니가 그녀를 수시로 아프게 했다. 작은어머니도 시집살이로 시달렸지만, 아이 셋을 데리고 얹혀사는 홀어머니와는 달랐다. 그녀는 늘 마음이 찢어지고 혼이 나가 생명이 가물거렸다. 밤에는 강도에게 쫓기는 소리를 토해내서 옆에 자는 나를 얼어붙게 했다.
어느 날은 온몸에 쥐가 나는 마비 증상으로 한밤중에 더운물을 끓여 수건으로 마사지하느라 날 새우는 때도 많았다. 때론 호흡곤란이 와서 엄마를 품에 안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40대 초반의 과부 아닌 과부는 생과 사의 경계에 있었다. 호된 찬 서리 속에서 나는 일을 만들었다. 엄마를 할머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긴급 탈출을 감행했다.
금호동 언덕 길가에 양장점을 열 수 있는 상점이 나왔다. 건물 뒤쪽에 살림방과 부엌도 달렸다. 전세 계약을 마치고 양장점 공사에 들어갔다. 서울대 응용미술과 졸업반이었던 친구 승희가 디자인을 도와주었다. 흰색 외벽에 큰 쇼윈도를 만들었다. 입구의 문은 프렌치 스타일로 여덟 개의 격자창으로 안이 들여다보였다. 바깥벽과 안의 쇼룸도 모두 흰색이었다. 하얀색 장식장을 짜서 한쪽 벽을 채웠다. 의자도 흰색 통으로 된 긴 의자와 작은 통 의자 몇 개를 만들었다. 현대식 인테리어로 빨간색 꽃무늬 방석을 나무 상자 의자 위에 활짝 핀 꽃으로 올려놓았다. 나도 솜씨를 발휘했다. 두꺼운 까만 나무판에 하·얀·집· 세 글자를 조각해서 흰 벽에 붙임으로 상호를 완성했다.
국화의 ‘하얀 집’ 시대를 열었다. 해가 져서 어둠이 내리면 쇼윈도는 은은한 붉은 불빛을 뿜어낸다. 어둡고 죽어가던 금호동 거리에 따스한 소망을 보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그리고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모여들어 양장점 오픈을 축하해 주었다. 승희는 졸업 작품처럼 하얀 집을 디자인해 주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내가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엄마는 양장점 마담이 되었다. 아담하고 멋스러운 실내에서 손님을 받았다.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옷감을 고른 뒤 디자인을 찾아보라 하고 차 대접을 했다. 저녁에 디자이너인 딸이 오면 다시 와서 결정하라고 하며 손님을 보냈다.
시간제로 재단사와 재봉사를 두어 그들도 도왔다. 그때는 외출복은 양장점에서 맞추어 입던 시대였다. 동네 양장점이기 때문에 손님은 대부분 가정주부와 처녀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꼽 잡고 구를 우스운 비즈니스였지만 양장점은 죽지 않고 나아갔다.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고운 모습도 살아났다. 다정한 친화력으로 친구도 생겨 쇼룸이 가득해졌다. 하얀 집 마담이 된 엄마. 얼굴 위에 기쁨의 눈물방울이 매달렸다. 그녀는 딸을 위해 육첩 반상을 차렸다. 나는 좁은 방에서 엄마를 꼭 껴 앉고 잤다. 그녀 얼굴에 웃음이 영글었다. 엄마의 마비 증상과 호흡곤란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도 악귀가 힘들게 하는지 잠꼬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꿈에서 깨면 안도의 숨을 쉬며 다시 잠이 들곤 했다. 한쪽 남은 폐로 숨을 쉬어도 몸에 살이 붙었다.
쇼룸의 재산목록 1호는 큰 전축이었다. 낮에는 「카사 비앙카」, 밤이 되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베토벤 교향곡도 울렸다. 하얀 장식장에는 여러 색깔의 옷감을 넣어 진열했지만, 한 구석에는 몇 권의 책도 꽂혀있었다. 양장점 고객인 선배 연숙 언니와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전혜린을 얘기했다. 그녀는 여고 은사 김용팔 시인의 딸이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베스트셀러일 때라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친구들이 졸업과 동시에 결혼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노처녀가 될까 봐 두려웠다. 부지런히 옷을 만들어 입고 멋을 부렸다. 직장동료, 양장점 손님, 그리고 친구들이 신랑감 소개를 해 주었다. 나는 영어를 잘했고 미국에 갈 것 같은 야심 찬 남자에게 관심을 두었다. 멀리 떠난 친구들이 야속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회사가 끝나면 자주 양장점에 들렀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밥상은 인정을 먹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경상도 시골뜨기 남자는 서울에서 살며 엄마 냄새가 나는 공짜 밥이 그리웠던 것 같다. 반대하던 엄마를 향해 어머님 밥을 매일 먹고 싶다고 애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 준비를 했다.
카탈로그에서 봐두었던 신혼여행을 위한 원피스를 골랐다. 흰색 새틴 감에 청색 패턴이 밑단 전체에 들어가는 독특한 옷이었다. 만들기 힘들어서 한 번도 주문받지 않았었다.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몇 주 걸려 완성했다. 그것을 쇼윈도에 걸었다. 예술이었다. 그도 만족했는지 예비신랑은 주인처럼 재봉사와 재단사를 내보냈다.
국화의 「하얀 집」 간판은 내려졌다. 엄마는 늘 얘기하곤 했다. 마담으로 살던 그때가 인생의 정점이었다고. 팔순을 넘기면서 저 세상으로 가신 내 어머니, 마지막 길을 따라 장지까지 있어준 친구 김승희는 귀국해서 금속공예과 교수가 되었다. 대통령상까지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는 원로작가이다. 엄마는 늘 그 친구의 활동을 물으며 고마워했다. 그녀도 엄마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그 곳, 엄마에게 삶을 준 「하얀 집」.
지금은 내 가슴에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