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허냐야 하나 달고 나오지…. 그냥 나왔냐? 배포는 커서... 달고 나오지…. 차 조심하고, 물조심해. 할아버지가 다 도와준다. 도와줘"
수영 엄마가 작두 위에서 방울을 흔들며 가족들에게 공수를 주면서 내 차례가 되자 하는 말이었다. 수년간 왜 똑같은 말만 하는지 궁금했지만 무서워 묻지 못했다.
엄마는 맏아들이 월남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은 후부터는 딴사람이 되었다. 기절을 밥먹듯 하다가 회복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당신네 집에 곧 큰일이 터질 거라 말했던 만신을 수소문해 찾아간 것이었다. 만신이라면 질색했던 사람이 빚까지 내어 굿판을 벌이니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다. 아버지는 물론 오빠와 언니들의 충격이 대단했다. 그러나 늦둥이인 나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큰오빠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요란한 신을 믿는 엄마가 창피할 뿐이었다.
굿과 푸닥거리를 가족들이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쌍한 엄마에게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셋째 언니가 미션스쿨에 다니고부터는 크고 작은 분란이 그치지 않았다. 성경 공부는 물론 주보(예배 프로그램) 제출이 숙제여서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하자 엄마는 앙앙불락이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째 언니까지 전도해 기도하고 찬송도 모자라 밥상머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부터 찾으니 엄마의 잔소리는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자 작은오빠는 무교를 선언했다. 그는 굿 소리를 들으면 배가 아프고, 찬송가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엄마는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잘못될까 봐 단골집을 정한 건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며 서운함을 토로하셨고, 한독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큰언니는 집 소식을 듣고, 그곳에는 천주교인들이 많다며 쾰른 대성당 사진엽서에 '저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다른 사람을 꼭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써서 보내왔다. 처음에는 염장 지른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 했으니 잘한 것 같다고 하였다.
몇 년 후 수영 엄마가 노환으로 입원하고, 훗날 그녀의 딸이 수녀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홧김에 늘 함께였던 넷째 언니를 따라 불자가 되었다.
나는 방관자였다. 종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믿음을 강요하는 인간들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을 빌미로 지나치게 믿음을 상대에게 주입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행한 악행과 실수를 변명하는 도구로 삼고, 책임을 회피하는데 신이 쓰일까 두려웠다. 차라리 현실에서 부모 형제간 화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수중축대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늦둥이로서 연로하신 엄마와 언니들의 뒷바라지를 안 할 수 없었다.
셋째 언니는 출가 후 전도사로서 사역 활동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친정 식구들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박받는 언니를 보면 영화 ‘벤허’에서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어 처음 강단에 서던 날, 그렇게 반대했던 엄마는 언니의 설교를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지노귀굿도 하고 사십구재 지내드렸으며 추모예배도 참석하셨다. 20년 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사십구재 지내고, 위령미사와 추모예배도 드렸지만, 망자가 가장 원했던 지노귀굿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에는 당신이 추종하는 신을 받들면서도 자식들이 믿고 따르는 신도 존중해 주셨으니 복락을 누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