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시작
노정애
도망치듯 강릉으로 갔다.
결혼 30년, 며느리, 아내, 엄마, 그리고 딸로, 앞만 보고 달리느라 늘상 종종거렸다. 나이 탓인지 마음은 수시로 널을 뛰었다. 불쑥불쑥 끓어오르는 화는 통제 불능이라 불만과 짜증을 달고 살았다.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한 팬데믹(2021년) 상황이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가족에게 독설을 쏟아냈다. 돌아서서 후회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집에 있는 것도 식구들과 주변을 돌보는 것도 힘에 부쳤다. 책 몇 권과 간단한 짐을 챙겨서 떠났다.
서울에서 KTX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 바다와 송림, 경포호를 산책하고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책을 읽었다. 해변에 나가 일출을 보고 저녁이면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별을 봤다. 혼자만의 여행도, 일상에서 벗어난 나만의 시간도 처음이었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지루함은 없었다. 잠시 쉬어 가라는 선물 같은 시간. ‘나만 이렇게 편해도 되나?’ 자주 식구들에게 미안했다. 집이 그리워질 즈음 돌아왔다. 일주일 정도가 딱 좋았다. 자유롭고 여유가 넘치는 쉼은 지쳐있던 내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행복한 주부의 귀환은 가족들까지 편안하게 했다. 남편은 1년에 한 번은 이런 여행을 가라며 허허 웃었다. 그러나 내년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해에는 부산에 사는 지인이 가끔 쉬거나 친구들과 놀기 위해 마련한 집을 언제든 이용하라는 말에 날을 잡았다. 산복도로 위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짐을 풀었다. 처음에 낯설었던 골목도 몇 번 다니니 내 집 골목같이 편안해졌다. 골목을 걷고 시장 구경을 다니는 도심에서의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좋아 멍하니 창밖만 보다가 배가 고프면 적당한 식당에서 허기를 달랬다.
“언니 쉬는데 미안하지만 우리도 가면 안 돼?” 가까이 살아 늘상 들락거리는 사촌동생들이다. 나이차도 적고 아이들도 함께 키우다 보니 가족처럼 가깝다. “언제든 환영이야.” 다음 날 부산역으로 마중을 갔다. 그리운 이를 기다리듯 설레며 동생들을 맞았다. 낯선 곳에서의 만남도 셋이서만 하는 여행도 처음이라 우리는 마냥 들떠서 신이 났다. 족히 몇십 년은 되어보이는 동네 목욕탕에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피로를 풀고 한이불 속에서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그리스 산토리니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고 국제시장을 여고생처럼 깔깔거리며 돌아다녔다. 동네를 걷다가 들어간 오래된 금은방에서 이것저것 보여달라는 우리에게 귀찮은 듯 투덜거렸던 주인 어르신이 마스크를 벗은 동생에게 “아가 니 참말로 예쁘네.”를 연발하며 얼을 뺀 모습으로 갑자기 친절해진 것은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다. 혼자여도 함께여도 쉼은 달콤했다.
돌아오면서부터 내년에는 ‘어디로 갈까?’를 떠올렸다. TV에서 여행지가 소개되거나 누군가 다녀왔는데 좋았다는 말만으로도 그곳은 어떨까? 제주도는 너무 먼가? 선배 언니가 세컨하우스를 언제든 쓰라고 했는데. 전주는? 한옥마을 근처에 숙소를 구하면 먹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남해의 한적한 섬마을도 가볼까?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전국의 모든 곳이 후보지였다. 1년의 기다림. 이런 소소한 생각들을 하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는 올라가고 마음은 풍선처럼 둥실 떠올라 한없이 즐거워졌다.
올해는 경주로 정했다. 몇 해 전 남편과 잠깐 들렀을 때 대능원 근처 너른 잔디밭을 보면서 ‘누워서 책 읽기 좋겠다’ 했는데 이번에 그래봐야겠다. 언제가 좋을까? 관광객이 많이 오는 봄은 피해야 한다. 7, 8월은 너무 덥다. 그사이 팬데믹이 끝났다. 10월, 가을이 물드는 계절. 집안 행사나 다른 일정이 없는 일주일을 비웠다. 앞뒤로 특별히 신경써야 할 일도 없는 적당한 날이었다. 물론 다른 변수가 생기면 다음으로 미루면 된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경주관광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무료로 여행 안내서를 보내준다기에 신청했다. 숙소와 KTX 예약도 끝냈다. 책은 이민지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으로 정했다. 꽤 두꺼운 두 권이라 좀 무겁지만 놀며 쉬며 읽기는 좋을 것이다. 텀블러와 돗자리도 챙겨야지. 옷은 무엇을 넣어갈까. 서울보다는 좀 따뜻하려나? 어슬렁거리며 동네 걷기에 편한 슬리퍼도 넣자. 한 달여 남은 시간 틈틈이 머릿속으로만 짐을 싸니 가방이 점점 커진다. 많이 덜어 내야 할 것이다. 야간에 특히 좋다는 ‘동궁과 월지’를 산책할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그곳에 가 있다. 기다림도 즐겁다. 이런 일상이 내게는 모두 쉼의 시작이다. 지난해 부산에서의 시간이 좋았는지 동생들이 “며칠만 함께해도 될까?” 묻는다. “좋지, 언제든 와.” 또 어떤 추억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쉼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벌써 내일 출발이다.
<한국산문> 2025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