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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한 잔    
글쓴이 : 박지니    25-03-31 16:35    조회 : 1,043

막걸리 한 잔


사람들의 잔이 술로 채워진다. 누군가 농담이라도 던졌는지 한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맨정신으로 하지 않을 이야기를 술기운을 빌어 옆 사람과 나눈다. 기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몇몇씩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니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나는 술잔 대신 물병을 앞에 두고 맞은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예전에 술병으로 고생한 뒤로 술자리를 피했다. 어쩌다가 참석할 땐 분위기를 맞춘답시고 첫 잔의 한두 모금만 마신 후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덜어냈다. 그러다가 잔이 비면 생수로 채우곤 했는데, 두어 해 전부턴 꼼수도 부리지 않는다. 그날 회식에서 옆에 앉은 동료가 잔에 술이 남아 있으면 남아 있다며 잔을 비우게 했고, 잔이 비면 비었다고 잔을 채웠다. 싫어요, 안 마실래요. 분위기를 깰까 봐 한마디를 못 해서 다 받아마셨다. 집에 오는 내내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은 쿵쿵댔고 온몸에 밴 술 냄새에 메슥거렸다. 집에 도착했지만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집 안이 훤한 것이 어머니가 아직 깨어 있는 듯해서였다. 냄새라도 없애볼까 싶어 한참을 대문 앞에 서 있는데 불 켜진 창 아래 시들어가는 꽃나무가 물어왔다.

오늘 기분 어때?”

아버지는 이따금 그리 물었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라고만 했다. 어머니는 시험 잘 봤냐, 발표 잘했냐, 소개팅 상대는 어땠냐 등 맥락이 분명한 일에 구체적으로 물어봤기에, “그냥 그랬어요.”로도 충분했다. 아버지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나는 뭐라고 답해야 했을까?

아버지는 술을 즐겼다. 젊은 시절엔 양주를 하다가 환갑 즈음에 수술을 받은 후로는 맥주를 마셨다. 술을 줄이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식사 때마다 와인 한 잔을 꼭 곁들였다. 단골식당 카운터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술 한 잔 따라놓고 주방장이 내주는 음식을 먹는 걸 좋아했다. “집밥은 맛없어.” 집에서 먹는 게 건강하지, 왜 그런 데 돈을 쓰냐. 어머니가 못마땅한 기색을 비칠 때마다 아버지는 불평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외식하는 만큼 과음도 잦으니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진 건 친구 탓이요 외식 탓이라고, 어머니는 여겼는지 모른다. 술을 전혀 못 하는 어머니로선 허구한 날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면 아버지는 내게, 요즘은 여자도 와인 한 잔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잔을 권하곤 했다. 나는 싫다고만 했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고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말이 내 인생은 한없이 편하다는 말로 들려서 입만 비죽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마시지 않고 그러는 척만 했어도 아버지는 알고도 모른 체했을 텐데. 회식이나 친구들 모임에서는 한두 모금씩 마시면서 아버지가 권하는 잔은 왜 받으려고도 안 했는지…. “여자애가 함부로 술 따르는 거 아니다.” 매번 같이 마시자던 아버지가 나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적은 없다.

나에게 아버지는 투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모든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건 아니어도 앞뒤 사정은 가늠할 수 있었다. 어쩌다 내게 화를 낸 후에는 금세 필요한 건 없냐, 가고 싶은 데는 없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 모습이 잘못을 저지르고 눈치 보는 어린아이 같아서 보기 싫었다. 그런 아버지의 딸인 나 역시 어린아이와 다름없었기에 내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아버지의 와인 한 잔은 막걸리 반 사발이 되었고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술을 금해야 했다. 건강했을 때도 정종은 맛없다던 아버지. 제사상에 막걸리 한 잔은 어떠세요? 물으면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

왁자그르르한 속에서 어떤 이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한 테이블에서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같이 흥얼거린다. 흥에 겨운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니 옆 사람도 따라 일어나 춤을 춘다. 각자 앉은 채로 고갯짓으로, 손짓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흥겹다. 나도 같이 취한다. 술 한잔 걸친 날에는 뽕짝을 즐겨 부르던 아버지에게 우리 집은 너무 조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들들은 결혼해서 제 가족만 챙기고 하나 있는 딸내미는 이 모양이니, 울 아버지 외로웠겠네.

기분 어때?”

생전에는 괜히 할 말 없으니 꺼내는 말이라고만 여겼다. 인생 별거냐, 건강할 때 놀아라, 젊을 때 즐겨라. 아버지가 그리 말할 때마다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살이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니 즐겁게 살려무나. 아버지는 그저 내가 웃는 걸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떠난 후로 해 바뀔 때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진다. 물어볼 수 없기에 점점 아버지는 모를 사람이 되어간다.

행복하니? 오가는 술잔들을 보니 아버지가 내게 묻는 듯하다.

술을 삼킬 때는 목이 아프고 마시고 나면 속이 쓰리다.

술을 보면 비뚤게 굴던 그때가 생각나 화가 난다.

그 기억조차 희미해질까 봐 나는 술잔을 비울 수가 없다.

 

한국산문, 20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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