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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지몽    
글쓴이 : 박지니    25-04-07 14:16    조회 : 486

예지몽


똑똑, 손을 떼기도 전에 열리던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나중에 다시 들를 요량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복지관 직원이 문을 열고 나왔다. 119 대원들이 흰 천이 덮인 들것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구급차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희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세상을 뒤엎었고 나는 땅 아래로 거꾸로 매달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땐 아직 새벽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하얀색과 회색으로 얼룩진 잔상이 아른거렸다. 연기 속에 휩싸인 듯 불안이 엄습했다.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아도 막연히 꿈 탓이겠거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뿌옇던 이미지가 선명해졌다. 처음엔 파란색이었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네모. 내가 아는 무언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겨울, 나는 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 봉사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혼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가 도시락을 전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보통은 단체에서 오거나 짝꿍과 함께 자원하기에 21조로 다닌다는데, 나는 혼자서 지도를 보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들을 찾아다녔다. 묵직한 가방을 몇 개씩 들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한겨울인데도 땀이 흐를 정도였다. 어느 날은 네 곳, 다른 날은 다섯 곳. 방문을 두드리면, 어떤 이는 반가워하며 들어오라 하고 어떤 이는 문틈으로 도시락만 챙겼다. 그런가 하면 다음부턴 노크도 하지 말고 가방만 문고리에 걸어놓고 가라는 이도 있었다.

마리아 할머니는 살갑게 맞이하는 쪽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파란색 문을 잡고 말없이 비켜선 채 내가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성당 다니시나 봐요.” 서랍장 위에 있는 십자고상을 보며 묻자 할머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도서를 꺼내 보였다. 열너덧 살, 어린 시절에 받았다는 그것을 전쟁 중에도 보따리 깊숙이 간직했다고 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목소리도 작아 절반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앞표지를 잃고 배면이 너덜너덜한 책의 외양처럼 할머니도 편치 않은 삶을 살아오셨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봉사를 하는 너덧 달 동안 배달지는 몇 번이고 변경되었다. 방문해야 할 분이 입원했다거나 일주일 사이에 돌아가셔서였다. 그날도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날 도시락 배달을 간 봉사자가 발견했다고…. 하루만 더 사셨어도 발견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

개꿈이었다. 꿈의 내용이 또렷해질수록 까닭 모를 두려움 또한 커졌다. 왜 하필 마리아 할머니의 집이었는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아흔을 훨씬 넘긴 노인은 늘 기력 없어 보였기에 언제 사망 소식을 들어도 놀랍지 않았을 터였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명복을 빌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시신을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 봉사는 다음 날 그만두었지만, 꿈에서의 느낌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성당에는 연일 장례미사가 있었다. 연이어 들려오던 한파주의보가 줄어든 봄에 마리아 할머니의 선종 소식을 접했다. 슬픔이나 동정과는 다른 감정이 목을 조였다. 도시락 배달 봉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할머니를 저버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만회하자는 마음으로 마리아 할머니의 장례미사 말고도 장례미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했다. 집에 병자가 있으면 장례식에 가면 안 된다는 속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건 미신이라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미신을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도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내가 쌓아놓은 복이 있으니 모든 것이 곧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게는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어이 우환을 가져왔구나. 장례미사도 장례식인데 집안에 들어서기 전 소금이라도 뿌렸어야 했다. 아니,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장례미사 따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연초에 불길한 꿈을 꾸는 바람에 죽음을 부른 것 같았다. 내 손으로 아버지의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손안에 낯선 감각이 가득했다. 그걸 지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 손을 뒤춤에 문질렀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에도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네면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 답했지만, 내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은 억누를 수 없었다.

겨울에 꾼 꿈은 어쩌면 예지몽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기회였는지도…. 이듬해 아버지의 기일이 지날 때까지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모던포엠, 20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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