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스쿠터
김명희
바쁘게 걷다 보니 마스크 속으로 내쉬는 숨결에서 달고나 타는 냄새가 났다. 빠듯하게 나섰기에 급히 움직였는데도 늦어버렸다. 김해행 승객께서는 빨리 탑승하라는 방송이 나를 더 재촉했다. 가끔 공항을 이용하다보면 사람들이 다들 즐거워 보여 좋다. 그들이 어디를 가건 무엇을 하러 가건 내가 보기엔 다들 즐겁게 여행을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공항에 갈 일은 대부분 여행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행이 아니다.
아버지의 몸이 이상하다는 남동생의 연락을 받았다.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힘이 빠지는 느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는데 어영부영 하다가 병원 가는 게 늦어졌고 그 사이에 오른쪽으로 뇌경색이 왔다고 했다. 심하지는 않다지만 걷는 것이 조금 힘드시고 오른쪽으로 편마비가 와서 식사도 조금 어려워하신다고 남동생이 전했다. 코로나 시기였다. 병문안도 어렵고 당장 내려온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아버지도 절대 알리지 말라 하셨다며 며칠 상황을 보자는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며칠을 그냥 보냈다. 다행히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나아진다는 연락이 왔다. 수술 없이 약으로 혈전을 녹이는 시술을 하자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남동생이 주관하여 간병인을 구하고 입원을 하셨다. 멀리 사는 딸들은 걱정을 덜었다. 아버지는 팔십이 넘도록 간단한 병원 진료도 거부하시는 분이셨다. 갑갑해서 어찌 지내실까 그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조금 불안한 여유도 부렸다. 하지만 먼저 병문안을 간 막내가 따로 전화를 했다. 아버지 뵈러 갔는데 막내딸 얼굴을 본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하셨다며 잠깐 다녀갔으면 하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이라도 빠른 교통편을 찾아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래도 바로 출발이 되지 않았다. 아픈 부모를 뵈러 가는데 나는 성한 자식의 끼니를 걱정하며 반찬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내고서야 집을 나섰다.
일상을 갑자기 접고 비행기를 탔는데도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승객들은 다들 즐거워 보였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 난생처음 집이 아닌 병원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입원이라고 해 본 적이 없는 부모님에게 병원에 갇힌 기분이 어떠실까 그제야 걱정이 되었다. 안내를 통해 입원실을 찾아 병원 계단을 올랐다. 무거운 공기를 맡고 마음의 무게를 느끼며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데 아버지가 링거를 꽂고 내 앞에 서 계셨다! 편마비가 와서 얼굴도 조금 틀어지고 한쪽 팔도 기운 없이 늘어져 약해진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서 계셨다!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만 생각하며 슬펐던 마음이 안심이 되어서인지 “아버지!”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가 즐겁게 들렸다.
나는 이틀간 겨우 30분 정도씩 아버지를 뵙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안와도 되는데 뭐 하러 왔냐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겨우 아버지 손만 두어 번 잡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괜히 먼길 오느라 고생만 했다 하셨다. 발음이 부정확해져 잔뜩 귀를 기울였더니 안면 마비로 틀니가 맞지 않아 빼 놓았다는 말씀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 아버지가 틀니를 하셨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아버지의 가장 젊고 건강했던 시절의 기억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늘 왕소금으로 양치를 하던 치과라곤 모르던 건치대장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지금의 나보다 젊던 사십 대의 아버지 모습만 떠오른다. 아버지는 며칠을 못 견디고 퇴원을 하셨다. 갑갑증에 하루 종일 오 분 십 분 단위로 병실을 들락거리셨다고 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되고 불편한 몸으로 다칠 수도 있다는 간병인과 간호사의 우려 섞인 잔소리가 아버지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벌써 이 년이 더 지났다. 아버지는 초기의 빠른 회복 뒤로는 아주 조금씩 차도가 있을 뿐이었고 여전히 불편하시다. 잘 걷지만 힘이 없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젓가락질도 힘들다. 얼굴의 마비는 도드라진다. 부정교합으로 발음이 부정확해져 사람 만나기를 기피하는 경향도 생겼다. 식사는 다진 음식과 부드러운 것들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운전을 못하셨다. 군대에서 전령이던 아버지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지만 그 이후 운전은 두려워져서 포기했다고 한다. 차가 사고 싶었던 아버지는 늘 아쉬워하시곤 했다. 우리 형제들 중 처음으로 둘째가 면허를 따자 아버지는 작은 차를 사 주시고 무척 좋아하셨다. 그랬던 분이 환갑을 훌쩍 넘긴 후에 어디서 스쿠터를 구입해서 타고 다니셨다. 기동력이 생기자 근거리에 밭도 하나 구해서 이것저것 심기도 하고 근처 바닷가로 낚시도 다니곤 하셨다.
지금도 친정에 들르면 계단아래 스쿠터가 서 있다. 아프시기 얼마 전 큰맘 먹고 새로 구입한, 아버지가 무척이나 아끼던 새 스쿠터다. 반짝반짝 예쁜 스쿠터가 비닐을 덮어쓰고 대문 밖만 쳐다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탈 수 있다고 하시지만 우린 절대 타지 마시라고 으름장을 놓곤 한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지막 스쿠터일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집 안만 뱅뱅 돌고 계신다. 마당으로 옥상으로 오르락내리락.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런 상황이 힘들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잘 하지 않는다. 두 분은 처음의 혼란을 넘어서자 상황을 훨씬 쉽게 받아들였다. 어찌 쉬웠을까! 그저 곁에서 함께하지 않기에,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두 분의 힘겨움이 내게 까지 오지 않는다. 듣지 않으니 나는 조금 걱정하고 조금만 힘겨워 했다.
그저 이 나이 되도록 건강하게 살았고 병도 이만하면 경과가 좋으니 다행이다 하시는 그 말씀만을 변명으로 내세운다. 잘 지낸다 그 말씀만 의지하며 나는 내 일상을 산다. 마당에 스쿠터가 잘 놓여 있는 것처럼 부모님도 늘 그 자리에 계시리라 한다.
계간 수필 - 2024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