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비 편에
잠자리가 떼 지어 낮게 날다가 야트막한 나무의 가지 끝을 톡톡 치고 달아난다. 계절의 어느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는지 노랗고 하얀 나비도 몇 마리 눈에 띈다. 요즘 눈앞을 오락가락하며 한 나절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게 사랑스럽다.
오후 볕을 가려주던 블라인드 저 편으로 손바닥만큼 커다랗게 흔들리는 나비 그림자, 궁금해 나와 보니 에게! 엄지손톱만하다. 그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다가와 베란다 창문에 얼굴을 비비댄다. 요리조리 기웃거리는 몸짓이 영 쓸쓸한 게 괜히 시어머님 생각이 눈가로 올라온다. 혹 이렇게 우릴 보러 오셨나 싶어 손 한 번 흔들어 보지만 떠나신 지 올해로 벌써 16년째다. 양지 바른 산자락에 모시던 날, 매서운 추위에도 홀연히 날아와 우리 곁을 맴돌던 커다란 검은 나비처럼 그렇게 다시 오신 건 아닐까.
어머니, 거긴 어때요. 그곳도 여기처럼 가을인가요. 그곳에도 단풍이 좀 늦어지나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던가요. 그 경계 넘을 때 어떠셨나요. 이제는 그 자리 익숙한가요. 혼자서 외롭진 않으신가요......
날마다 업어주던, 이제는 다 큰 손녀, 소영이를 기억하시나요. 자식보다 아이들이 더 맘속에 와 앉은 날 어머니 훌쩍 떠나셨잖아요. 얼마나 고것들 예뻐하셨는지 그 사랑을 생각하면 아직도 전 어미라는 이름에 자신 없어요. 고놈들 있기 전엔 몽땅 내 차지던, 저도 조금은 보고프신가요? 나는 여전히 어머님이 그리워요. 사랑이 깊으면 시샘을 한다며 그래서 서둘러 가셨다는 친척 어른들 말씀이 얼마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는지요. 사랑하면 오래 오래 같이 살았어야지요.
대학 새내기로 만난 지 4년 만에 처음 인사를 갔고 그 후로도 군 복무를 보태고야 비로소 우린 고부간이 되었지만요. 찾아뵌 그 여름날을 당신도 기억하시는지요. 차려주신 밥 한 그릇이 제삿밥의 고봉 같아도 맘에 든 증표려니 꾸역꾸역 다 비우고 밤새 체증에 시달렸던 건 모르셨지요? 그뿐인가요. 대문 열고 돌아서던 두 다리가 왜 그리도 발발 떨리던지요. 기어이 나팔꽃처럼 치마 주름을 펼치며 두 분 앞에 엎어진 일은 오호, 제발 그만 잊어주세요.
친정에서와는 또 다른 삶이기에 낯설고 두렵던 제게
‘네 인생은 네 것, 내 인생은 내 것일 뿐’ 이라며 지켜봐 주신, 어머니 왜 그리도 빨리 가셨나요. 아들만 둘인 재미없는 집안에 웃음꽃 피우며 주름도 펴드리고 은근히 풀어내신 속내와 상처들, 딸처럼 껴안아 녹여드리고 싶었는데, 청천벽력 암이라니요...
“ 네 고생을 생각하면 눈을 못 감아. "
마지막 걱정마저 며느리를 향한 병상의 그날이 어제만 같더니 함께 한 8년의 세월보다 더 멀리 온 지금, 추억 속의 당신 얼굴도 아득해집니다. 잊을 만하면 기껏 산에 올라 잠자리에 돋아난 잡초나 뽑으며 겁도 없이 어머니 아들 흉도 보고요. 재미없으면 나비처럼 날아갈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투정도 부려가면서 넋두리에 허락이나 받아내려던, 그렇게 그렇게 술 한 잔 뿌리고 돌아오는 길에 제가 얼마나 외로웠는데요, 어머니!
한 평생 바느질에 고단한 삶 지으면서도 ‘에미는 한복이 참 잘 어울려’ 해주신 애틋한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어요. 그렇게 늘어가던 저고리 숫자만큼 옷고름 쥐고 홍홍거리던 제 즐거움 돌려주세요. 공 들여 만들어 주신 아이들 때때옷은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이 되어 친정 조카들까지 돌려 입느라 낡아버렸지만 장난감 같은 조바위랑 꽃버선과 함께 아직도 서랍 잠을 자고 있네요. 그래서 어머니 냄새가 그리운 날엔 슬그머니 꺼내 사각사각 입어도 보며 빈 거울 앞에서 절도 하는 걸요.
어머니, 절 한 번 받으실래요. 옛날에도 절절하던 당신 앞에 오늘 다시 큰 절이 하고 싶어요. 금박 은박 꽃그림으로도 채우지 못할 어머니 사랑 닮은 그 치마 저고리 입고서. 남들처럼 고부간의 갈등은 시작도 못한 채, 너무나 짧은 만남에 따뜻한 기억만 주고 가신 당신을 고맙다 할까요 재미없다 할까요.
때로는 사는 게 슬픔의 복판이지만 물려주신 사랑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는 무던하고 꾸덕해진 자리에서 사느라 조금씩 잊어도 가며 그렇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미처 전하지도 못한 낡은 그리움들, 오늘은 나비 편에 보내드려요. 오래 오래 우리 곁을 맴돌아 주세요. 팔랑팔랑 그렇게 자주 오세요. 어머님 곁으로 제가 가는 날까지.
2009 <에세이스트>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