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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불 같은 순백의 스파트필름    
글쓴이 : 임매자    12-05-22 16:38    조회 : 4,003
   등불 같은 순백의 스파트필름    
 
  
   지금은 흔해서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이십여 년 전 화원에서 작은 포토에 담긴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경이였다. 잎이 넓은 것을 보니 난은 아닌데, 난 같은 것이 하얀 고깔을 쓰고 짙은 초록 우듬지 위로 불쑥불쑥 작은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흡사 서로 자기부터 봐 달라는 듯이.
 

신기하여 꽃집 주인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스파트필름(Spatiphyllum)이라고 했다. 하이얀 고깔을 쓴 백합 같은 그에게 스파트필름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았다. 집에 데려와 조그만 화분에 심었다. 어찌나 무섭게 자라던지 몇 년 동안 분갈이도 안 해줬는데, 부처의 후광 같은 불염포(佛焰苞) 안에서 하얀 꽃을 무성하게 피워냈다.
 

그렇게 대책 없이 자라기에, 물만 주면 잘 자라는 성품을 타고난 줄 알았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나눠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물만 잘 주라고 당부했다. 번식력도 뛰어나서 이웃에게도 그렇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우람한 화분이 여섯 개로 늘어났다. 마땅히 둘 자리가 없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금자리가 되었다. 보채지 않는 아기에게 젖을 자주 주지 않듯이 그렇게 관심을 쏟지 않았는데도 햇살 한 자락 닿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싱싱했다.
 

나는 해마다 한란에 대한 무분별한 애정을 거둘 수가 없다. 화원에 갈 때마다 이젠 안 사야지 하면서도 화사한 한란을 보면 어느새 하나라도 들고 있다. 그에 대한 애정은 해가 지나도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한란은 오랜 시간 한결같이 시중을 들어도 꽃 한 송이 보여 주기는커녕 까다롭기만 하다. 나는 이렇게 까다로운 한란을 왜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인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편안한 사람은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뭔가 좀 까다로워서 긴장시키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남편은 삼십 여년 자란 무겁고 우람한 관엽식물들을 해마다 겨울이 오면 거실에 들여놓았다가 따뜻해지면 햇빛을 쐬어주기 위해 베란다로 내놓는 정성을 쏟는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그들은 대부분 잎으로만 소임을 다할 뿐이다.
 
 
관엽식물(觀葉植物) 자체가 ‘잎’의 빛깔이나 모양을 ‘관상’하기 위하여 재배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파트필름은 사철 푸른빛을 내는 관엽식물이면서도, 사계절 내내 계단을 온통 짙푸른 녹색으로 무성하게 빛내고 실내 공기를 맑게 해주는 소임을 충분히 다했음에도 거기에 덧붙여 정갈한 하얀 꽃까지 피워낸다.
꽃집에서 순간적 충동으로 사온 그 꽃은 혼자서도 너무 잘 자라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날 봐달라는 듯이 하얀 손을 흔들고 있어서 왈칵 미안해졌다.
 
 
어느 날  화원에 들렀을 때, 스파트필름에게도 영양제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스파트필름의 꽃말은 ‘세심한 사랑’이라는데, 이렇게 무관심했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주야장천 물만 주었으니.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하얀 고깔이 서서히 줄어들고 잎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마다 물뿌리개를 기울여 줄기차게 뿌려준 물이 사실 무관심의 표현이었음을 그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2층으로 올라갈 때마다 내 치맛자락을 붙든다. 그래서 내려다보면, 어두운 계단에 짙푸르게 흐드러진 줄기들 위로 백합 같은 불염포가 적막을 깨물고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몸무게 5kg으로 태어나 언제 한 번 아파본 적 없이 싱싱하게 쑥쑥 자라서 1.76미터까지 키가 커버린, 늘씬한 몸매의 딸아이가 떠올라왔다. 왜 싱싱하게 잘 자라는 짙푸른 줄기와 정갈하고 하얀 고깔에서 하늘로 올라간 딸아이가 떠오른 걸까.
 

레이스 달린 여성스러운 옷이나 치마를 싫어하고 유니폼처럼 늘 청바지와 하얀 티만 즐겨 입던 해맑은 내 아이. 아이는 어린 시절, 내가 큰아들의 잦은 병치레에 신경 쓰고 유난히 딸랑거리며 뛰어다녀 ‘딸롱이’라고 불리던 막내아들의 귀여움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싱싱하게 잘 자라주었다.
계단에 무성하게 서 있는 싱싱한 식물들이 이 세상에선 닿을 수 없는 딸아이 같아서 꽃잎을 만지다가도 마음이 아프다.
 
 
웃자란 그리움을 가만히 열고 그의 곁에 앉으니 긴 잎사귀가 그리운 듯, 서러운 듯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진다.
하얀 봉오리를 끌어다 볼에 댔다. 수생식물도 아닌데, 영양제로 양분을 섭취하지 않고 물만 먹으면서 자란다고 생각했을까. ‘이 무식함과 무관심이 부끄럽구나.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미안하다.’ 영양제를 듬뿍 넣고 분갈이를 해주니, 얼마 후 푸른 숲 사이로 깨죽거리며 다시 하얀 고깔을 무수히 내놓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콜롬비아에서 처음 데려올 그때에, 그 고결한 모습에 걸맞은 우리 이름을 붙여 줬어야 했으리라. 백합같이 하얀 고깔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이름을 불러보아도 도무지 이 이름은 와 닿지 않는다. 순결한 순백의 등불 같은 내 아이에게 스.파.트.필.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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