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이제 보니 끼가 있으시네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미혼의 여선생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내가 끼가 있다니, 50평생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불온하게 여겨졌던 그 단어가 그 순간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니 칭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대학졸업 30주년 기념 특별공연을 위해 마음과 시간이 맞는 친구들 6명이 모여 매주 월요일 ‘북 난타(亂打)’ 연습을 하고 있었다. TV나 난타 공연장에서 볼 때는 그저 아무렇게나 신명나게 두들기기만 하면 되겠거니, 그래서 이참에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나 풀고 미웠던 사람 두들기듯 북을 두드리자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몸도 둔해지는 나이에 평소에 쓰지 않던 왼손으로 북을 두드리려니 엇박자를 놓기 일쑤였고 각기 다른 장단을 외워서 치는 것도 어려웠다. 겨우 머릿속에 장단을 암기해서 북 가운데만 보고 치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끼가 있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자신감으로 돌아왔다.
어느 새 몇 차례 연습을 하고 나니 운전하다 신호등에 걸렸을 때나 자려고 누웠을 때 손동작으로 북장단을 맞추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아마 우리 민족의 DNA가 내 끼를 끄집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끼라는 건 못된 망아지 엉덩이에 뿔이 난 것과 같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끼가 있다면 ‘야하다’, ‘바람기’가 있다는 말이 연상되었고 끼라는 것은 가무(歌舞)에나 어울리는 단어같았다. 따라서 끼는 비생산적인 일에 해당되는 단어로 개미보다는 베짱이에게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었다.
대학 다닐 때 고고장에서 하는 미팅, 소위 ‘고팅’이란 게 있었다. 고고장에서 나는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몸을 요란하게 흔드는 게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끼가 많은 여자처럼 보일까봐 몸동작을 귀엽고 조그맣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무도회장에서 조신해 보이기를 바란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음치에 몸치인 나는 바닷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영화 속 〈희랍인 조르바〉역의 안소니 퀸을 동경했지만 그것은 마음속에서 뿐이었다.
‘개미와 베짱이’ 동화는 즐기기만 하는 베짱이보다는 먹이를 부지런히 나르는 개미를 우위에 두고 찬양한다. 그러나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먹이를 실어나르고 베짱이는 옆에서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노래를 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열심히 일한 개미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끼를 키워 흥겨운 노래를 부르는 베짱이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개미의 끼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고, 베짱이는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닐까.
끼라는 단어를 재주라는 단어로 치환시키고 싶다. 학자에게는 공부 끼가 있어야 하고 축구 선수에게는 운동 끼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가 출세하려면 깡, 끈, 꿈, 꼴, 꾀, 끼 등 여섯 가지의 쌍기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꿈도, 꾀도 중요하겠지만 요즘처럼 튀어야 사는 세상에는 끼가 중요할 것 같다. 성공한 사람은 모두 끼가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즐기면서 하는 일이 끼가 아닐까.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즐기면서 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연예인만 끼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평범한 나도 어딘가 발산하지 못한 끼가 있을 것이다. 가풍 때문에, 도덕 때문에,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끼를 숨기고 살았다면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마음껏 끼를 발산하며 사는 게 정답일 것 같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니까. 기(氣)가 두 개 뭉친 것이 순 우리말인 끼가 아닐까 나름대로 해석을 해본다.
처음에는 맞지 않아 제 각각 불협화음을 연출했지만 어느 순간 딱딱 맞춰지는 게 신기하다. 그러나 5분 공연의 꽤 많은 분량을 머리로 외워서 몸으로 체득하기 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꿈에 부풀어 일단 이번 공연이 끝나면 경로당이나 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다니자고 의기투합했다.
처음 내게 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왜 통쾌한 기분이 들었을까. 잠재된 감춰진 나를 드러내는 것, 머리가 아닌 몸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에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들을 스타로 만들어 주겠다는 선생님의 약속을 믿고 몸 깊은 어딘가 있을 끼를 끌어내기 위해 북채를 잡는다. 그 날 평생 처음으로 서는 무대에서 내 끼를 발산해 보리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의 한 항목을 지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