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저마다 간절한 순간이 있었다. 짐승과 벌레와 풀들이 그들의 언어로 사연의 의미를 유전인자에 각인시킬 동안 그것을 제때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척추동물 사람과에 속하는 집단은 길과 길 사이에 나무와 돌, 쇠붙이를 걸쳐 놓고 그걸 다리라 부른다.
이 나라의 이름 있는 것들은 대개 왕이 지나갔거나 머물렀거나, 왕과 함께 살았던 여자와 그의 먼 핏줄들의 흔적이다. 힘 있는 자가 마음만 다부지게 먹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능성을 높여준 태조와 태종은 ‘살곶이다리’가 놓인 터에도 사연 하나를 빚어놓았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을 몹시 미워해 궁을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태종은 그늘막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아들을 보자 다시 화가 치밀어 활시위를 당겼는데 그 화살이 그늘막의 기둥에 꽂혔다는 일화 때문에 화살이 꽂힌다는 뜻의 ‘살곶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살곶이벌은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면서 생겨난 들판이다. 물과 풀이 넉넉하여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말을 놓아길렀고 임금이 군대를 친히 검열하거나 매사냥 터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곳의 물길 위에 놓인 살곶이다리는 사적 제160호로 성동구 행당동에 있다. 교폭 20척(6m), 길이258척(78m)으로 교각을 횡렬로 4열, 종열로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로 건너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로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았다.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으며, 기둥은 유수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다듬었다고 안내서는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에게 읽히려고 써놓은 글인지 모르겠다.
기와를 얹어 예스럽던 안내판은 근처에 유적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었는데 뜬금없이 직사각형 아크릴판으로 바뀌어 저 혼자 멀찌감치 서 있다. 담당공무원들의 미적 감각이 심각하게 별스럽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돌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이 ‘살곶이다리’다. 사냥을 즐기던 정종과 태종이 물길을 편히 건너가게 하려고 효성스런 세종이 공사를 지시하였으나 태종이 죽고 홍수까지 겹쳐 중지했다가 63년 후인 1483년(성종 14)에 완성했다고 한다.
산책로에서 벗어나 낮게 내려앉은 다리는 숨차게 걸어서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적당히 밀려나 있었다. 이사 와서 보게 된 다리였는데 만취한 노을이 가로등을 툭툭 건드릴 즈음 산책을 나섰기 때문에 나 역시 흘깃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자 한낮의 산책로에 사람의 기척이 끊겼다. 은폐되었던 호기심이 살곶이다리로 나를 떠민다. 얼결에 한 발 내딛었다. 느닷없이 사방이 넓다. 움칫 놀라며 서너 걸음. 고작 내를 가로지를 뿐인 작은 다리 위에서 마주친 낯선 느낌에 횡재한 듯 대여섯 걸음. 그러면서도 이내 맘속 걱정거리가 날아간 것처럼 편안해져 열댓 걸음. 금세 차오른 평온이 사라질까봐 조심스레 또 몇 걸음. 그러다가 발아래에서 번져오는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늦게야 깨닫는다. 다시 다리의 처음으로 돌아가 굵직한 기둥들을 내려다보았다. 힘이 불끈 솟은 사내들의 팔뚝 같다. 목봉체조를 하는 해병대원들처럼 굳건한 의지로 무언가를 다짐이라도 해야 할 듯 단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발걸음을 옮기며 다리의 먼 쪽을 바라보았다. 뭉툭한 교각에 걸맞게 난간이 없고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은 단순한 다리의 형태는 자유롭기까지 하다. 곡식 한 자루쯤 너끈히 널어놓을 만한 돌판도 있다. 걸음걸음이 느긋해진다. 평지를 걷는 느낌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렸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리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일순간 걸음을 다시 멈추었다. 걷는 맛이 초입의 그것과 달라서였다. 내려다보니 옛돌판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크기의 회색빛깔 네모난 돌들이 벽돌담을 드러눕힌 것처럼 틈 하나 없이 서로 앙다물고 있는 현대식 다리였다. 이성계와 방원의 어색한 만남을 흉내 낸 퍼포먼스라도 되는 양, 상념에 빠져든 짧은 시간이 낯간지러울 만큼 다리는 무미하고 지루하게 이어져 있었다.
1920년 홍수로 다리의 일부가 유실되었다가 1973년에 복원될 때 하천 폭이 전보다 넓어져 콘크리트로 덧이어 놓은 곳이었다. 사라진 돌 때문에 한동안 다리가 폐쇄되었던 적도 있었다하니, 석수장이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누르스름한 옛돌판 사이에 전기톱으로 자른 돌들이 의치를 끼운 듯 간간이 섞여 있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옛것과 같은 석재를 구해보려는 맘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었을까. 같은 종류의 돌은 아니어도 모양과 색깔을 티 안 나게 덧이었다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낮아졌을까. 시절이 달라진 탓이라고 떼를 지어 소리치는 옹색한 돌들은 아크릴 안내판과 비슷한 감각의 산물인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다리의 반을 헐어 경복궁으로 가져갔다는 풍문 속의 흥선대원군이 이루고자 했던 조선은 역사에 파묻혔고, 다리는 원래의 형태를 간신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중랑천을 5m쯤 깊이 파내어 뱃길을 내겠다는 서울시의 꿈속 같은 계획이 들려왔었다. 새로운 물길에는 청계천처럼 정화된 물을 내보내겠다하였으니 다리 위에서 숨 쉬는 맛은 더욱 좋아질 것이되, 한강르네상스의 기치 아래 살곶이다리는 뱃길에 밀려날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했었다.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한강과 르네상스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정치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야 하는 다리의 운명 앞에서 왕들을 위해 평지같이 느껴질 만큼 크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던 그 시절 노역을 생각한다. 그러나 바람결에 흔들리던 풀들은 베어지고 길 위에 떠돌던 발끝의 사연들은 붉은색 아스콘 밑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산책로를 걷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다리를 건너는 몇 안 되는 사람들도 거의 운동복 차림이다. 그들은 소통보다는 육체적으로 탈 없이 살기 위해 두 팔을 휘저으며 제 다리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뿐인가, 유적 보존을 위해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안내문을 무시한 채 씽씽 내달리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무너진 다리는 소통의 의미를 돌이켜보게 하는 그림의 소재로 오히려 멋지게 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의미가 소멸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아름다운 순간이 한번쯤은 오지 않을까. 연인들이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듯, 불화하여 괴로운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가 몰개성적으로 얽혀 있는 살곶이다리 위로 가볼 일이다.
중앙선 전철의 응봉역에서 내려 다리의 한가운데 서라. 그러고는 마치 서부활극의 주인공처럼 등을 돌려 걸어 보라. 아들에게 화살을 쏜 무모한 이성계에 다가갔다가 기겁했을 방원에게로 돌아서보는 것도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금이 가라앉은 길마다 모두 끊어진 듯 여겨진다면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강 쪽으로 길게 이어진 양쪽 둔치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쪽이든 잠시 후엔 강에 다다를 것이고, 봉긋하게 누워있는 응봉산으로도 길이 열렸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바람은 늘 불어요. 우리, 살곶이다리에서 봐요.”
매를 부려 꿩을 잡던 살곶이벌의 응사처럼 스마트폰을 부려 사연의 실마리를 허공으로 날렵하게 띄워보자. 살곶이다리의 절정은 바로 그 순간부터일는지도 모른다.
-2012. <<한국산문>> 2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