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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여자가 있는 벤치    
글쓴이 : 조정숙    12-05-31 09:49    조회 : 3,693
그 여자가 있는 벤치
 
조 정숙
 
공원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작은 벤치 하나가 놓여있다. 그늘진 곳에 자리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도 아니기에 벤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한 채 늘 비어있는 곳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그 곳에 내 또래의 여자가 나와 과일을 팔고 있다. 맑은 화장에 세련된 머리 스타일, 어색한 표정은 그 벤치의 분위기만큼이나 과일 장사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왕래도 없고 다른 노점상들이 있는 곳과는 거리도 멀어 장사하기에 그리 적절한 장소가 아닌 듯 한데 자그맣게 전을 펼쳐 놓곤 멀뚱멀뚱 앉아 있다. 내어놓은 물건도 참외 몇 무더기가 전부였다.
 
 
그 여자가 그곳에 나오기 시작 한지 이삼일은 됐을까? 구청 단속반인 듯한 두어 명의 남자들이 다짜고짜 참외 상자를 들고 가버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예전에 몇 번 본적이 있던 다른 노점상들처럼 실랑이도 하지 않았고 봐 달라며 애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벤치에 앉아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과일을 팔아 준적도, 눈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지나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을 창피스럽게 여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여자가 보지 않게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원 울타리의 빨간 넝쿨 장미는 유월의 따가운 태양 아래서 탐스럽게 너울대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장사는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상처를 많이 받았나?’ ‘이젠 안 나올 건가?’ 며칠 동안 그곳을 지나 칠 때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벤치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허옇게 뭉그러졌던 잔디가 다시 푸르스름해지고 빈자리가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여자가 나타났다. 참외만 놓여있던 자리에는 빨간 토마토도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 놓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처음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몇 걸음 나아가 횡단보도 앞에는 과일 노점상들이 여럿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과일을 먹어보라며 권하기도 하고 재미난 몸동작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그들의 수선스러움으로 인해 그 앞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런데 몇 번을 지나치며 보아도 그 여자는 호객 행위는커녕 과일을 등진 채 구부리고 앉아 책장만 넘기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쩌다 값을 물어보면 그제야 “물건은 참 좋아요. 산지에서 직접 가져온 거예요.” 할 뿐이었다. 어떤 날은 늦은 저녁 시간까지도 참외가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곤 했다.
 
 
시간이 가면서 그곳은 산책 나온 할머니들의 쉼터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수건으로 과일을 닦아주는 할머니, 흐트러진 과일을 바구니에 보기 좋게 담아 놓는 할머니도 있었다. 벤치가 여자의 멋진 상점으로 자리 잡아 가던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서 장사를 하던 아저씨 들이 그곳을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빈 상자를 집어 던지고 바구니를 발로 차기도 했다.
참외 몇 개는 터진 채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울고만 있지 않았다. 같이 대들며 싸우지도 않았다. 그냥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많이씩 안 팔게요. 조금씩만 가져다 팔게요”
모여든 사람들과 산책 나온 할머니들의 만류로 아저씨들은 그쯤하고 돌아갔다.
 
 
벤치 상점을 차지하기 위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서야 그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참 다행히도 바로 위에는 가로등이 달려 있어 따로 전등을 설치하지 않아도 늦도록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일주일에 한 번 산지 직거래 장터가 열려 싱싱한 과일을 싸게 살 수 있다. 날씨도 더운데 공원까지 나가기가 귀찮아 망설이다 장터로 향하는데 멍하니 앉아 있던 여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발길을 돌려 공원으로 갔다. 여느 때처럼 참외를 수건으로 깨끗이 닦고 있었다. 나란히 늘어놓은 참외 무더기가 그대로 인 것으로 보아 아직 개시도 못 한듯했다.
“아줌마, 목요일은 장터가 열리는 날이라 좀 덜 팔릴 텐데요.” 나는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강아지랑 산책하시는 것 가끔 봤어요. 고맙습니다. 다음부턴 목요일은 물건을 조금만 가져와야겠네요.”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참외 한 무더기를 봉지에 담아 돌아서는데 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눈에 들어와 만 원어치를 샀다.
“덤 이예요” 하며 뒤쪽 상자 안에 있던 토마토를 두 개 더 넣어주었다. 무거운 과일 봉지를 들고 낑낑 거리며 돌아오는데 웬지 모르게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살아가는 길에는 늘 화창하지만은 않다. 예상치 못했던 소나기도 만나고 폭풍을 만나기도 한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다. 팍팍한 세상속으로 헤집고 들어서는 일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겠지만 낯선 그녀에게 주어진 시련의 무게가 가뿐하게 물리칠 수 있는, 그 정도의 것이기를 바래본다.
 
 
그래서 공원의 벤치가 과일 상점이 아닌 그냥 벤치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할 어느 멋진 날을 기다려 본다.
그녀의 좁은 어깨위로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부서져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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