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무래도 어렵겠는데요...”
비용이 들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며칠 뒤 돌아온 대답은 돈도 필요 없단다. 복구불능이란다. 복.구.불.능! 절대 안 된다는 쌀쌀맞은 답변이다. 기계치라 기능이 단순한 걸 쓰다가 아이들이 등 떠미는 바람에 업그레이드된 물건 한번 손에 넣었더니 자격 미달이라는 경고인가. 반질거리도록 어루만지며 수족인 냥 데리고 살던 내게 이건 너무 야박한 선고다.
좁은 골목길로 달려드는 차를 보며 놀란 친구가 내 허리를 채갈 때 뒷짐 진 손에 허술히 들렸던 물건이 그만 포물선으로 날아가 버렸고 그 위를 지끈 밟고 사라지던 봉고차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우린 헤벌쭉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몸을 날려 구하지 못한 내 탓인 걸 어쩌랴. 쓸모없어진 전화기를 되돌려 받고 서비스센터를 나오는데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푹 꺼진다.
기계 하나 망가뜨려 숫자 몇 개 날린 건 얘기꺼리도 아닐 테니 새로 장만하면 그뿐이었다. 익숙한 번호들은 금세 되찾을 테고 빈 칸은 새 번호로 다시 채우면 되는 거였다. 지금껏 저장된 번호도 햇수를 넘기며 그대로 낡아가던 판에 자주 안부를 묻는 위인도 못 되고 보니 오히려 심심하기까지 한 전화기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잊고 잠깐 헤맬 때처럼 왠지 나를 충전해주던 감정의 작은 회로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다 한꺼번에 픽, 나간 듯 깜깜해졌다. 뭔가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 단순히 속상한 게 아니라 막막해지는 기분, 오히려 한번쯤 정리하려던 차에 홀가분해야지 이게 웬 일이람.
게다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생활이 불편하니 어느새 기계의 노예가 다 되고 말았다. 새거나 다름없는 걸 망가뜨린 게 염치없어 몇 군데 대리점들을 돌며 가능한 한 공짜 폰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대리점 장사엔 정도(正道)란 게 없는지 여기서는 공짜가 저기서는 엄청 비싸고 또 조기서는 헐값이란다. 대신 구매를 확인하는 전화가 오면 실제와 다른 말을 해달라는 요상한 거짓말도 주문하면서.
또 가게 풍경이란 것도 쇼 윈도우를 도배하는 문구마다 그저 다 ‘거저고 공짜’ 여서 저 회사 이익이나 날까 싶은 데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필시 그들만의 장삿속은 따로 있지 싶다. 공짜를 뒤지는 내 모습만 봐도 고칠 길 없는 유통구조의 악순환이 회사와 고객 사이에 빼도 박도 못하고 맞물려 끌려가는 꼴이다. 그렇게 몇 군데 허탕을 치는 중에 문득, 그 많은 번호들과의 추억을 슬그머니 뒤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손전화기를 사고 맨 처음 저장한 번호는 누구의 것이었더라. 아이들, 남편, 아니, 친정 엄마였나. 그도 아니면 일과 삶에서 동떨어진 뜻밖의 숫자였을까. 꼭꼭 누르던 긴장과 설렘도 이미 기억 밖이고 다시 거기서 더 달아나 아득해진 지금, 새떼처럼 날아간 번호가 이백 여개도 넘다니 새삼 놀랍다. 그렇게나 많은 번호와 번호에 닿은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하면서 지금껏 전화기 속에다 가둬 둔 나도 참 대단하다.
그래도 삶이 고단할 때마다 의지한 건 군데군데 남겨둔 추억이었다. 어느 봄밤의 골목길 그 노랑 가로등 아래 쏟아지던 벚꽃들이며 커피 한 잔의 달콤함에 취해 밟던 삐걱거리던 카페 계단, 일과 사랑에 빠져 끝없이 외치던 갈등과 열정의 목소리들, 하다못해 오래 된 실연의 치명적인 빛깔마저도 그 사람들이 숫자에 물린 채 그리움의 목록을 채워왔었다.
지금이야 곁을 잠시 떠나 있는 두 딸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가장 애틋하게 기다려지지만 통화를 눌러 다시 불러내지 못해도 그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이 돼 준 그 시간과 이름들이 새삼 떠오른다. 이제 복구불능의 전화기처럼 뿌옇게 낡아가던 기억마저 아주 떠나갈까 두려운데 이게 혹, 버리고 비우는 연습 중에 그만한 게 없다고 내 앞에 내미는 시험과제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던 내가, 다시 새 전화기에 빠져 있다. 새 것이라 좋고 아담하고 날렵해 손 안에 착 안기는 맛은 더욱 좋다. 수시로 만지작거리며 뚜껑을 밀어올리고 내리는 손장난만으로도 내 허술한 정서의 불안을 채워주는 녀석을 잠시도 외면할 수가 없다. 아주 저렴한 놈으로다 구해서 새로운 인연으로 메워가고 있으니 이 징그럽고 놀라운 적응력을 어찌 할거나!
잃었으나 결코 버린 게 아닌 기억 밖 번호들과 이제는 영영 작별하면서, 다만 누군가도 나처럼 제 전화기 속 외딴 방에서 늙어가는 번호가 외롭지 않도록 실수로라도 한 번씩 눌러주기 바랄 뿐이다. 그곳에서 사는 건, 희미해지긴 해도 결코 불능일 수는 없는 삶의 영원한 에너지일 테니까.
전화기를 열고 되찾은 번호 중에 하나를 고른다. ‘당신'이라는 이름의 숫자를 가만히 누르니 낯익은 음악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날아든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우냐!
<에세이 플러스 2009.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