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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과 속    
글쓴이 : 이상태    12-06-01 18:53    조회 : 2,796
                                       겉과 속
 
 
  일본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올 때에는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금방 속이라도 똑 떼어줄 것처럼 친절한 백화점 아가씨들에게 죄를 짓고 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일본인들의 친절은 끝이 없다. 아마 지구에서 이들보다 더 친절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모두 그렇게 친절한 줄로만 알고 있었던, 참으로 순진했던 내가 매우 황당한 일을 겪었다. 70년대 중반,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회사에 다니면서 유럽출장을 갔다 오던 길에 도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일본지사에서 귀국길에 자기네 사무실에 들러 업무협의를 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숙소는 일본 동료들이 그들의 사무실 가까운 시나가와(品川) 역 부근 한 호텔에다 정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 주변에서 쇼핑이나 하려고 나섰다. 여름이었으니 복장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매력적인 상품들에 홀려 이 가게 저 가게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웃거렸다. 선물도 몇 가지 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동안 큰길을 몇 번 건넜고, 육교도 오르내려 호텔에서는 제법 멀어진 듯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밤이라 호텔로 가는 길이 아슴푸레했다. 좀 고생을 하면 못 찾아갈 리야 없겠지만 그럴 것 없이 누구에게 물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옆에 경찰초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길이라면 경찰보다 더 정확하게 가르쳐줄 사람이 있겠는가. 짧은 일본말로 호텔이름을 대고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한데, 경찰은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뜸 여권을 보자고 하였다. 여권이야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가는 난리를 겪어야 하는 귀물(貴物)인데 입국심사 할 때나 보여주고 깊은 곳에 잘 간직해야지 이까짓 호텔 주변 쇼핑 나오면서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호텔에 두었다고 하였다. 경찰은 바로 어디다 전화를 걸었고 조금 후에 순찰차가 한 대 오더니 나를 그 차에 타라고 하였다. 나는 이 사람들이 길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호텔까지 직접 데려다 주려고 하는구나, 짐작했다. 과연 일본 사람들의 친절은 못 말린다며 내심 감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데려간 곳은 호텔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한 형사가 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졸지에 밀입국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런, 어디로 보아 내가 그렇게 보였단 말인가. ‘날 잡아가시오.’ 하고 제 발로 경찰을 찾아다니는 밀입국자도 있던가. 갑자기 그렇게 친절하던 일본인들은 온데간데없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각반(脚絆) 두르고 일본도(日本刀) 찬 순사만 눈에 어른거렸다. ‘바로노 대라, 바로노 대지 않으면 혼이노 난다!’ 금방이라도 순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나를 무시무시한 지하 고문실로 끌고 갈 것만 같았다.
순간, 어느 일본통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일본에 가서는 갑갑하더라도 일본말을 하지 말고 영어를 사용하라고 충고하였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서 일본말을 잘하면 잘할수록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인은 자기도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일본 사람들이 강한 나라에는 약하고 약한 나라에는 강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부터 더듬거리던 일본어를 그만두고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콤플렉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학교 다닐 때 앓았던 영어몸살의 후유증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괴로워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얼굴을 찡그린 채 내 영어를 듣고 있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일본 자위대 안에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요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고 하더니 형사의 우리말 실력도 보통은 넘었다.
 
  그제야 나도 편하게 우리말로 바꾸었다. 내가 미국회사에 다닌다는 것과 유럽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지사와 업무협의를 하려고 도쿄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을 뿐 일본에는 더 있어달라고 사정을 해도 결코 더 머물지 않을 것이라며 명함을 건네주자 형사의 태도가 금방 부드러워졌다. 내가 들먹인 미국이 그 새 형사에게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신기하였다.
 
  그는 하던 조사를 그만두고 나를 호텔에 데려다 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호텔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제야 이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친절한 일본인’으로 복귀하였구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도 착각이었다. 형사는 호텔 내방까지 따라와 기어코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마치 위조지폐 감식이라도 하듯이 여권 한 장 한 장을 구멍이 나도록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형사야 맡은 바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심받고 있는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길을 묻는 관광객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조사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느냐고 내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형사는 일본법에 외국인은 언제 어디서나 여권을 소지하도록 되어 있으며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던 나는 일본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였다. 법을 위반한 죄인이니 콩밥도 먹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처럼 멀쩡한 일본관광객이 여권을 호텔에 두고 나온 채 서울시내에서 쇼핑하다가 호텔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면 한국경찰은 과연 어떻게 하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국경찰은 그런 일로 일본관광객을 경찰서로 끌고 다니며 조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경찰이 직무유기를 하는 것일까, 일본경찰이 하지 않아도 될 무리한 조사를 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내게 형사가 여권을 되돌려주고 방을 나가려고 하였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만일 미국인이 길을 물어보았어도 당신들이 오늘 나한테 한 것처럼 똑같이 조사하였을까요?”
형사는 그런 것이야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라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미국인이 물어보았으면 조사하지 않았지요. 당신은 한국인이니까 조사한 겁니다.”
 
  그는 마치 나보고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 ‘한국인이니까’를 강조하며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여권불소지죄’로 콩밥을 먹더라도 도대체 미국인과 한국인이 뭐가 다른지 끝까지 따져보고 싶었지만 속이 모질지 못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세월이 한 세대만큼 흘렀다. 텔레비전을 켜자 멜빵을 내려뜨린 한국 아이돌 그룹이 엉덩이를 휘저으며 노래 부르고 객석에서는 또래 일본 젊은이들이 소리 지르며 열광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아이돌 그룹과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춤과 노래를 따라 하는 장면도 이어진다.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일본공연 뉴스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하나 되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다만, 순진한 한국인들이 저들의 겉만 보고 속까지 빼주었다가 어느 날 당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수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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