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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시의 추억    
글쓴이 : 이상태    12-06-01 19:16    조회 : 2,903
                                             국시의 추억
 
 
  국시에게 미안하다. 언제부턴가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슬며시 뒷전으로 밀어놓더니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봉다리네 밀가리네 유머까지 만들어가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국시가 결코 국수보다 못나지 않았다. 기계로 빼는 국수는 첩의 얼굴처럼 반지르르 하지만 홍두깨로 미는 국시는 속 깊은 조강지처처럼 순수하다. 국수의 국물은 네 것 내 것 분명히 가리자는 현대인의 마음처럼 말갛지만 국시의 국물은 옛사람들의 인정처럼 걸쭉하다. 도시사람을 닮아 똘똘한 국수의 면발에서는 고개 빳빳이 쳐든 저항이 느껴지지만 시골사람처럼 어수룩한 국시의 그것에서는 넙죽 엎드린 순종이 느껴진다. 내게 국시는 뒷전으로 밀려난 변방의 음식이 아니라 유년시절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 그 자체다.
 
  가난은 흉도 아니고 죄도 아니라지만 가끔 사람을 치사(恥事)하게 만드는 점이 슬프다. 들에서 힘쓰는 남자들에게나 잡곡밥에 웁쌀을 조금씩 얹어줄 뿐 여자들과 아이들은 죽으로 연명하던 시절, 겸상한 아이는 자꾸만 아버지의 밥그릇이 넘겨다보였고 아버지는 먹던 밥을 얼마쯤 남겨 슬며시 아이 앞으로 밀어주셨다. 아이에게는 끼니때마다 아버지의 밥그릇을 곁눈질하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힘드셨다. 장에 가면 친구들 만날 일이 두려워 얼른 볼일만 보고 뒷길로 해서 쫓기듯 집으로 돌아오셔야 했다. 큰길로 다니다가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한 잔 하고 가라 붙잡을 것이고 이를 뿌리치지 못해 한 번 두 번 자리에 앉다보면 어느 새 공술은 야금야금 아버지의 자존심을 갉아 먹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추수하게 되는 햇밀은 모두를 기쁘게 한다. 갓 빻아온 가마니 속 밀가루에 손을 넣어보면 뜨끈뜨끈하다. 그것은 눈치 빠른 정미소 제분기가 농부의 급한 마음을 알아 제 몸이 부서지도록 피대(皮帶)를 돌려댔기 때문일 것이고 이제 그 갸륵한 마음은 국시의 온기가 되어 가족에게 전해질 것이다.
 
  들에서 먼저 들어와 반죽을 밀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쁘다. 때맞춰 가족들 앞에 햇국시를 놓아주고 싶어서다. 밀가루를 휘휘 뿌려가며 홍두깨를 눌러 밀 때마다 반죽은 둥그런 국시판으로 늘어난다. 다 늘인 국시판을 좁다랗게 접고 가지런하지 않은 첫 부분은 싹둑 잘라 접은 국시판 밑에 겹쳐 놓는다. 이를 지켜보던 아이가 어머니 뒤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이는 아까부터 국시꽁지를 노리고 있다. 어 어 하는 사이 앞 꽁지는 사라져버렸으니 뒷 꽁지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 젓가락이라도 국시의 양을 늘리고 싶은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더 긴 국시꽁지를 갖고 싶은 아이 사이에 일전(一戰)이 시작된다. 아이는 꽁지에서부터 자신의 욕심만큼 거슬러 올라간 자리에 손을 짚고 있다. 칼날이 조금씩 꽁지를 향해 움직여 올 때마다 아이의 손은 옴찔옴찔 뒤로 밀려난다. 계속 그렇게 밀리기만 하다가는 헛일이 되어 울음보가 터질지도 모른다. 아이는 한 지점에서 밀려나던 손을 딱 멈추고 비장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본다. 거기가 최후의 보루라는 신호이며 결연한 의지이자 간절한 애원이다. 칼을 사이에 두고 밀던 어머니의 실용과 밀리던 아이의 응석이 마주쳤다. 그러나 어머니의 실용이 사랑으로 바뀌어 응석을 껴안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이 놈의 자슥.”
  이윽고 어머니는 파안대소하며 썰던 칼을 놓아버리고 아이는 전광석화처럼 전리품을 낚아채어 줄행랑을 쳤다.
 
  뎅그렁뎅그렁 맑은 워낭소리가 초저녁의 적요(寂寥)를 깬다. 봄부터 풀을 밟혀 지금은 덩그렇게 높아진 거름더미 위에서 암소가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마당가에는 타닥타닥 모깃불이 타고 알싸한 연기는 뒤뜰을 돌아 집안을 휘감는다. 가족이 모두 마당에 내다 놓은 들마루에 앉았다. 바지랑대에 걸어둔 등피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오늘따라 더욱 은은하다. 가끔 가족들이 부치는 부채소리가 모깃불 타는 소리와 장단을 맞춘다. 어둠이 짙어가면서 하늘에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무수한 별들이 나타나고 그 한가운데를 은하수가 허옇게 가로 질렀다. 멀리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뻐꾹 뻐꾹 희미하게 들려온다.
 
  어머니는 가족 앞앞에 국시 한 그릇씩을 퍼다 놓는다. 국시에는 연한 애호박이 들었을 뿐 고명조차 없다. 가족들은 풋고추 썰어 넣은 양념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후루룩후루룩 소리 내어 먹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국시가 꿀맛이다. 모처럼 서로 권하며 배불리 먹는다. 세상에 듣기 좋은 것이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소리라고 했던가. 어머니는 습관처럼 또 군대에 간 큰아들이 생각난다.
  “에이고, 야는 이런 맛도 못 보는구나.”
 
  퍼지기 전에 햇국시를 이웃에 한 그릇씩 돌리느라 부산한데 아이는 부엌에서 봉긋하게 구워 온 국시꽁지를 손에 들고 어머니 무릎을 베었다. 아이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별들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반딧불이가 제 흥에 겨워 불연속선을 그리며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어쩌다 별똥별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아이는 탄성을 지른다. 칠석(七夕)은 멀지 않았고 은하수 양쪽에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견우와 직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이에게까지 들리는 듯하다.
 
  어릴 적 먹던 그 국시 맛이 그립다. 생각이 간절해질 때면 만사 제쳐두고 그 맛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보지만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 걸쭉한 국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훗날 저 세상에나 가면 만나볼 수 있을까.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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