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첩을 넘기다가 흑백으로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슬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자 할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키우며 돌봐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엄마’ 하고 불러 본다. 방안을 둘러 보아도 없다. 눈을 뜨면 보이던 어머니의 모습은 없고 할아버지 기침소리만 집안 분위기를 서늘하게 했다. 성격이 급한 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 다녀도 네 에미는 없다. 얼른 정지(부엌)로 들어가서 밥을 해오너라 이제 니가 해야 한다” 는 말소리가 들렸다.
바가지로 쌀을 퍼서 찬물로 씻는다. 작은 손이 쌀뜨물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헹구는데 물과 같이 쌀이 밖으로 나와 주위로 흩어진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혼이 날까 봐 등이 뻣뻣해진다. 얼른 무쇠 솥에 넣고 뚜껑을 닫으려니 무거워서 겨우 닫았다. 나무를 아궁이에 넣고 성냥으로 불을 부친다. 연기가 눈앞을 가려 눈물이 난다. 손으로 연기를 쫓아 보려고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 해서 나무를 아궁이 속으로 집어넣는다.
할아버지는 “이게 무슨 냄새고, 밥이 탄다.” 하는 소리에 얼른 뚜껑을 열어보니 밥이 시커멓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며 꾸중을 했다. 무서워서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도망을 쳤다.
멀리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달려서 간다. 엄마가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 가면 꾸중을 들을 텐데. 그래도 하는 수 없이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줄무늬가 얼굴에 더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내가 하나 더 생기게 만들었다.
동생 추자랑 고무줄 놀이를 해야 하는데 고무줄이 삭아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까 하는 순간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땅 바닥에 줄을 긋고 어린 동생을 속여 먹기로 했다. 똑 바로 그어진 곳에서 내가 놀이를 하고 추자는 아무렇게나 그어진 줄을 밟아 금방 틀려서 내 차례가 된다. 신나게 놀다 보면 밥 먹을 때가 된다. 밥을 챙겨서 할아버지와 같이 반찬도 없이 먹는다. 우리를 보고 한숨을 지으며 밥숟갈을 놓고 지게를 지고 땔감을 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신다.
다리가 약간 불편한 몸으로 높은 산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 가까운 산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서 오면 그것을 말려 땔감으로 썼다. 가시가 많아서 잘 못하면 찔려 피가 나기도 하고 손에 박혀 바늘로 빼야 할 때도 있다. 놀고 있는 손녀 딸이 걱정되어 밥을 한다. 할아버지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 것을 보고 방안으로 들어와 서로 장난을 치며 기다린다.
반찬을 만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 향이 방안까지 들어 온다. 오이 냉국! 여름은 뭐니 해도 그게 최고의 별미다.
오이(물외)를 심은 밭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인데 그것을 따오는 일은 내가 한다. 할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을 신고 밭으로 간다. 그 신발을 좋아해서 잘 신고 다녔다.” 손녀 딸이 신을 신고 다니면 꾸중을 했다. “여자가 발이 예뻐야지 크면 못 쓴다” 하며 웃는다. 신발 바닥의 뒤꿈치 쪽으로 줄을 긋고 그 안에 작은 발을 넣고 신는다. 신발에 줄이 생겼다고 혼꾸녕이 났다.
오이는 초여름에 노란 꽃이 피고 길쭉한 열매는 녹색에서 황갈색으로 익는데, 물기가 많고 맛이 시원하다. 오이 김치, 오이 깍두기, 오이 나물 등 다양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다. 들에 나가서 오이 줄기를 들어 보면 마디마다 달려있는 것이 자식들이 엄마를 따라서 소풍을 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오이는 씨가 있어도 도둑은 씨가 없다’ 는 속담처럼 마음을 잘못 가지면 누구나 도둑이 되기 쉽다는 뜻도 있다.
샛문으로 밥상이 들어온다. 얼른 일어나 숟갈을 들고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신 후에 먹는다. 오이채를 썰어서 집 간장과 깨소금, 마늘, 쪽파를 약간 넣고 찬물을 부어서 만든다. 아주 간단하지만 맛이 있는 반찬이다.
어린 것이 설거지 하면 그릇이라도 깨져 손이 다칠까 염려스러워 할아버지는 직접 설거지를 했다. 솥 안에 빈 그릇을 넣고 씻는다. 마지막에 솥을 깨끗하게 헹구어 낸 다음에 뚜껑을 닫고 물 묻은 행주로 주위를 마무리하고 부뚜막을 닦는다
물기가 마른 후에 부엌에 들어가보면 솥뚜껑 위에 할아버지의 자욱이 남아있다. 행주가 지나간 자리에 하얀 줄 무늬가 생겼다. 그 줄을 보면 슬퍼졌다. 힘든 자국이 남았다.
여름 밤이면 구슬픈 목소리로 <심청가> 를 들려주곤 했다. 흐느끼는 목소리에 담배연기를 후~우 높이 뿜는다. 눈물이 보일까 손으로 눈을 닦으며 연기 때문에 따갑다고 했다. 배탈이 날까 홑이불을 덮어 주는 손이 고생스러워 보였다.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나온다.
시원한 날에는 손녀들한테 책을 읽어주는데 모르는 글자는 음~음 하고 그냥 지나간다. 우리는 웃음이 나와서 손으로 입을 막고 할아버지 등 뒤에서 웃는다. 들키면 끝장이다.
“사람은 평생을 착하게 살아야 한다.” 는 교훈을 주었다. 두 손녀를 끔직하게 사랑해준 할아버지의 무서운 귀신 이야기로 벌벌 떨며 몸을 오그리고 잠이 들었다.
2009년 한국산문 등단작품
2009 영전초등학교 <꿈동산>수록
2009 재경도민일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