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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꽃사랑    
글쓴이 : 김데보라    12-06-04 08:05    조회 : 4,427
 

 

 
들꽃사랑

2002년 <<한국수필>> 7/8월호 등단작


들꽃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들꽃의 생명력은 대체 어디서 오는 힘일까. 세월이 갈수록 너른 들판을 지천으로 수놓은 들꽃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 간다. 건드리면 끊어질 듯 가녀린 몸으로 수만 년을 이어온 그 생명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꽃피는 사월이다. 눈부신 햇살이 부서지며 반사되는 들판에 나가 무심한 눈길로 널려진 들꽃들을 바라보노라면 평화의 물결이 파문을 일으키며 촉촉하게 마음을 적셔준다. 나이 듦이란 어쩌면 자연과 닮아 가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닌지. 죽음 같이 잠자던 생명들은 긴 겨울의 북풍한설을 견디고 대지에 불끈 솟아올라 꽃을 피운다.

작디작은 들풀들이 색색 옷을 떨쳐입고 꽃 잔치를 벌인다. 달래와 나싱게(냉이), 씀바귀는 무리 지어 모였고. 거문도의 새끼노루귀와 울릉도의 큰 노루귀, 관매도의 갯돌나물도 보인다.
 
 
 
산꼭대기 높은 곳에 살기에 늦었는가. 백양산의 백양꽃, 내장산의 자란초, 계룡산의 솜분취, 덕유산의 어리병풍 드디어 나타났네. 아네모네라 하는 바람꽃인 너도 바람꽃과 홀애비바람꽃은 어디를 쏘다니다 이제야 오는 건지. 섬 처녀인 울릉도 섬장대와 제주도의 구름체 모두모두 모여서 환희의 찬가를 부르며 너울너울 꽃 춤을 춘다.

젊은 날엔 크리스탈 꽃병에 꽂힌 하이얀 안개꽃에 쌓인 선홍색 장미가 가슴이 설레도록 좋았는데---. 들에 핀 꽃처럼 잔잔한 감동과는 다르니 소박한 자연미에 이제 눈이 떠진 걸까? 모든 풀은 꽃을 피운다. 들에 핀 꽃들을 들꽃, 풀꽃이라 한다. 이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들판이나 바위틈, 그늘이면 그늘, 척박하면 척박한대로 그 자리에 솟아올라 풀들은 아담스레 꽃을 피워 노래부르며 춤을 춘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자연환경을 생명대로 이어가려는 들풀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젊은 날엔 장미꽃 같은 인생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들꽃 같은 인생이 참된 삶이 아닐까 싶은 자각에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시선이 차츰 달라져 간다.
내 나이 열 세 살 때 살았던 연희동은 논과 밭과 산 그리고 산자락 귀퉁이는 공동묘지였었다.
 
큰 신작로보다는 지름길인 묘지를 지나면 우리 집이 있었기에 학교를 오가며 산소 앞 고개 숙인 할미꽃, 뒷동산에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젊어서도, 늙어서도 할미꽃이라는 그 꽃을 예쁘고 곱다하여 모가지를 또옥 분질러 머리에 꽂고 가슴에도 달고 놀았었다.

그 시절엔 생명에 대한 신비함이나 소중함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며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젠 할미꽃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꽃, 소중하고 귀한 꽃이 되었고. 백발노인의 머리를 연상시켜서 백두옹(白頭 )이라는 그 할미꽃 소리만 들어도 애잔한 슬픔이 물빛으로 가슴 한가득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지천으로 널려진 하찮아 보이던 민들레가 어찌나 당당해 보이는지---. 내가 달라진 걸까 그들이 달라졌나. 내가 달라졌을 것이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니 어리석어 볼 수 없었던 신비함이었다. 그리고 생명의 힘 앞에 선 내 모습을 돌아보는 마음이 열리는 것일 게다.

들꽃은 보는 이, 알아주는 이, 돌봐 주는 이 없어도 물과 햇빛만 있으면 제 시절을 꽃피운다. 더 달라 하지도 보채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삶의 지혜를 터득하여 나름대로 어느 곳에서나 순응하며 꽃을 피운다. 높은 산이면 산에서의 지혜로, 나무가 무성한 곳에서는 햇빛을 가리기 전에 꽃피워 열매 맺는 지혜로움으로, 물위에서는 잎을 띄워 사는 지혜로 종족번식을 위해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꽃을 즐겨 사랑하지만 들꽃들은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꽃피운다. 사람들은 그들을 식용, 약용, 염료, 관상용, 장식용으로 사용하지만 불평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꺾이며 짓밟히나 더 많은 자손들을 꽃피워 퍼트린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사랑의 햇빛과 인정의 물을 주어야만 꽃피워 사명을 다하나 들풀은 혼자서도 삶에 적응하며 지혜롭게 꽃피워 번성하니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

자연은 그를 닮은 사람이 아름답고 가까이 하는 것만큼 진실을 보여준다.
들꽃이 내게 묻는다.

"넌 아름답니?"
"넌 진실의 꽃을 피우니?"

그에게서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와 진실과 사명의 삶을 깊이 만난다.
나는 들꽃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반드시 피어나는 그 생명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단작 <한국수필> 2002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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