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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름을 품은 한라산    
글쓴이 : 고보숙    12-06-25 22:42    조회 : 3,768
                    오름을 품은 한라산
                                                                                              고보숙
 
 공항을 빠져 나와 오른쪽으로는 가없는 푸른 바다를 끼고 왼쪽으로는 4월까지 흰 눈을 머리에 얹고 우뚝 솟아 있는 한라산의 호위를 받으며 일주도로를 달린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은 듯 한라산 아래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오름들과 늘 푸른바다를 피할 순 없다. 15분쯤 달리다보면 내 어릴 적 먹고 놀기에 정신이 팔렸던 우리 집이 나온다. 봄가을 소풍 때면 힘들게 올라갔던 오름들이 나즈막이 앉아 나를 반긴다. 송충이구제를 나가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그것들을 집게로 집어올려 깡통에 담아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던 소나무 숲들이 이젠 주택단지가 되어 있다.
 
 일주도로 아래쪽으로는 해안도로가 나 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큰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히며 날리는 물거품을 맞으며 걸을 수도 있다. 제주시 애월의 바닷가는 물가까지 다가와 우뚝 선 절벽들이 많아서 달밝은 밤이면 바다로 뛰어내리며 노는 달빛들이 어린애마냥 정겹다. 제주 올레길이 제15코스까지 열리며 걷기 열풍이 불고 있으나 우리 동네 바닷가는 아직 올레길로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절경에 비해 사람들이 붐비지 않으니 더욱 한가하게 지낼 수 있다. 바람이 불어 골 깊은 파도가 칠 때 나는 파도 앞에 서 있기를 좋아했다.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잡초 무성한 초록의 목장과 같다. 밀려드는 파도는 끊임없이 달려드는 조랑말의 무리들이다. 흰갈기 푸른 갈기를 휘날리며 쉼없이 뭍으로 오는 수 천 수 만 마리의 조랑말들, 그 말들을 가슴으로 받노라면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큰 한 숨이 올라온다. 그 길고 큰 숨을 내뱉고 나면 가슴 속에 쌓였던 아픔과 나를 눌렀던 짐들이 실려나와 흩어지면서 마음 또한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바다로 나가고 싶은 아이들처럼 까만 바위들이 바닷가 물 속에 한 발짝을 담그고 있다. 물속에서 절벽과 남몰래 손잡고서 바다로 삐죽이 나가 있는 코지(곶)들엔 낚시꾼들이 붐빈다. 아버지도 낚시를 좋아하셨다. 낚는 것만을 즐기셨기에 잡아 온 고기들을 손질하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 몫이었다. 틈이 날 적마다 낚시도구를 챙기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눈총은 따끔한 총알이 장전되어 아버지를 겨냥한다. 어느 해 여름, 그런 아버지가 가여워 보여 늘 엄마 편이던 내가 가족낚시를 핑계 삼아 낚시를 갔다. 밀물이면 사라졌다가 썰물이면 나타나는 작은 여(바다 가운데 솟은 작은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낚시바늘에 새우를 꿰어 고기가 다닐만한 곳으로 날렸다. 입질을 기다리며 집중하는 시간은 산중 도인들의 시간과 같지 않을까? 물 위로 오똑하게 솟아 있던 찌가 물속으로 잠방거리는 그 찰나, 때맞춰 낚시대를 잡아챘다. 손바닥만한 볼락이 하필이면 그 조고만 볼따귀에 낚시바늘이 꿰어진 채 딸려 나왔다. 그 볼락으로 여성부 1등을 해서 고급 틀채를 상품으로 받았다. 아버진 나만큼 기뻐하셨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다른 주방용품이었더라면 엄마도 좋아하셨을 텐데 싶었다.
 
 잔인한 4월이라고 했던가. 해방이 되고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곳엔 광풍(狂風)이 몰아쳤다. 낮에는 순경들이 동네사람들을 닦달했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들볶았다. 죄도 없이 끌려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사람들. 그 바람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집은 거의 없었다. 이른바 4.3사건이다. 같은 바람을 맞아서 일까, 더욱 돈독해진 이웃들은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은데도 삼촌이모하며 지낸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겪은 일들을 따져 선을 그으려 하지 않고 서로 섞여 살아간다. 산에서 내려온 개천물들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서 섞이면서 푸른 물로 둥실둥실 파도타며 살듯이.
 
 바닷가 마을마다 정해진 구역의 바다가 있어서 공동으로 해산물을 키우기도 하고 날을 정해서 한 집에 한 사람씩 나가 단체로 청소를 하기도 한다. 평평한 곳에 원담(갯담)을 만들기도 한다. 큰 돌 작은 돌로 4,50cm높이의 반원 형태로 쌓은 원담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물 고기 창고다. 밀물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드러나는 원담 안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들이 남는다. 여름이면 수많은 멜(멸치)떼들이 은빛 비늘을 파닥이며 살아있음을 춤춘다. 새벽산책길에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심마니의 외침처럼 “멜이여, 멜, 멜 들었쪄~!" 외치면 동네사람들은 잠자리를 박차고 눈곱이 붙어 있는 채로 뜰채나 바구니, 골채(삼태기)등을 들고서 달려 나온다. 부지런하고 힘센 이들은 싱싱한 멜이 넉넉하게 담긴 바구니를 들고 돌아 온다. 동네어귀에 앉아 팔기도 하고 미처 나가지 못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갓 잡아온 멜은 지천으로 널린 시퍼런 푸성귀와 함께 국거리가 된다. 남비에 물을 끓이고 푸성귀를 숭숭 썰어 넣고 팔닥이는 멜을 한 줌 털어 넣어 만든 국이 아침상에 올라오면 그날 아침 식사시간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세상에 비싼 음식 중의 하나가 캐비어라든가? 카스피해 연안에서 자란 나이많은 벨루가라는 철갑상어의 알이 가장 비싼 음식 축에 든다고 하지만 우리 멜국에 비할 수 있을까.맛있는 음식처럼 멋있는 사람도 많다. 조선시대 최초의 여성 시이오였던 김만덕을 비롯하여 <광정당 일기>의 현길언, <순이삼촌>의 현기영, <빙벽>,<최후의 계엄령>의 고원정, 전 법무부장관 강금실, 스포츠 칼럼니스트 고두현, 탤런트 고두심, 한나라당 원희룡, 백범학술원장 신용하, 케이비에스 진품명품의 홍일점 감정위원 양의숙, 보이스 컨설턴트 김창옥, 여섯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 미국사회의 존경을 받는 전혜성 박사의 남편인 고광림 박사가 제주 출신이다. 사시사철 푸른 잔디에서 바람과 함께 한 골퍼 양용은과 송보배도 이름을 떨치는 이곳 사람들이다.
 
유채꽃과 레저스포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하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흑도야지는 그 맛을 나는 사람은 안다. 사람들이 기겁을 하는 돼지 요리중의 하나는 애저회다. 잡은 돼지의 태 속에 있는 새끼돼지를 물회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주도의 별미다. 이것은 애저를 잘게 다져서 고춧가루, 깻가루, 김, 생강, 잔파, 참기름, 미나리등으로 갖은 양념을 한 후에 계란노른자와 식초를 넣어 조리하며 그 맛이 시원하여 속풀이 음식으로 많이 찾는다. 주류 해독 작용과 정력 보강 작용, 쇠약 피로 회복, 질병 퇴치 촉진 작용 등의 약효가 있다고 한다.
 
바람과 돌이 많고 척박한 땅이라서일까, 1만 8천여 신들의 고향이라는 제주도에는 미신을 믿는 풍습이 많다. 봄이 오기 전 신구간을 지키는 풍습이 그중 하나이다. 신구간은 대한(大寒) 후 5일째 되는 날로부터 입춘(入春) 3일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이사도 하고 버릴 것들을 버리면서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는 것이다.2월에는 제주를 대표하는 축제인 ‘제주정월대보름 들불축제’가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519m)에서 밤을 밝히며 벌어지기도 한다. 360여 오름 중 하나인 새별오름 전체30만 제곱미터를 다 태우는 축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제주도에는 오래전부터 소와 말등을 방목하며 중산간 지역 목야지에 해묵은 풀과 해충들을 없애려고 불을 놓았다.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에 마을마다 벌였던 옛 목축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을 전통민속축제로 만든 것이다. 오름오르기, 대옹놀이, 줄다리기와 달집태우기 등을 벌이며 무사안녕을 기원한다.안개가 자주 피어오르는 4월엔 한라산자락에서 여린 고사리들이 돋아나 청정고사리축제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가을이면 너른 들판에 활짝 핀 억새가 바람에 날리며 흰물결을 이루며 많은 오름들과 함께 어우려져 제주도의 얼굴이 되곤한다. 한라산 중턱에 산굼부리 억새가 유명하다. 서쪽으로 차를 달리다 섬을 돌며 동쪽으로 향할 무렵이면 우뚝 솟은 산 하나가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제주섬을 만든 설문대할망의 아들 중 하나가 사냥이 잘 안 되자 화가 나서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이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다. 옥황상제가 화가 나서 한라산의 꼭대기를 뽑아 던진 곳이라는 산방산이다. 생겨난 시기는 다르지만 실제로 백록담의 넓이와 산방산의 둘레가 비슷하다고도 한다.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면 산 중턱에 자연석굴(山房)이 있고 그곳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부처님 앞에는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의 눈물이라는 물이 바위를 뚫고 떨어진다. 물을 하 모금 마시고 뒤를 돌아보면 발아래 마라도와 가파도가 푸른 바다위에 오롯이 떠 있다. 힘겨웠던 다리품이 보상을 받는 순간이다. 굴사를 내려오면 거기 또 다른 비경이 숨어 있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길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용머리 해안이 있다. 수천 만년동안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 암벽이 절경을 이룬다.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이루어진 둘레 2킬로미터의 바위 하나가 바다와 함께 절경을 이룬다.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이기도 하고 패션잡지에 자주 오르는 등 많은 사진가가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길도 많이 변하고 논과 밭들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 서 있다. 동네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내 마음속에는 옛 그대로인 고향.너른 바다에 떠 있는 섬 위에 홀로 솟아 자잘한 오름들을 품은 그 땅이 내게는 휴식이다. 피곤이 쌓일 때면 등 뒤에 비빌 언덕으로 그 푸른산이 마음속에 가만히 떠오른다. 그 품 속을 파고 들어가 온갖 것 다 잊고서 지나온 시간을 싹둑 잘라 아이였던 시절에서 어리광부리고 싶다. 따스한 봄바람에 출렁이는 파도 따라 언제라도 내 마음은  고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10/04**에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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