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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길에는 다른 만남이 있다.    
글쓴이 : 진연후    12-07-05 11:36    조회 : 3,967
다른 길에는 다른 만남이 있다
진연후
길을 잃은 걸까.
지하도에서 시장에서 때론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곳에서 갑자기 멈추어 설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지. 길을 잃었나봐. 방송 끝난 텔레비전 화면처럼 머릿속이 지직거린다. 단순한 화살표를 이해할 수 없다.
30여 명이 함께 한 산악트레킹. 밤9시에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려 지리산 입구인 상백무 매표소에 도착한 시각은 다음 날 새벽 1시 40분. 이슬비인지 안개비인지 얼굴을 스쳐가고 한밤의 공기는 가슴속까지 알싸하니 좋은데 깊이 잠들어 있을 나무며 새들을 깨우는 일이 생각할수록 미안하다.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아침 여섯 시쯤 천왕봉을 눈앞에 두고 장터목 산장에서 오르기를 멈추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빗줄기는 산행을 강행하는 것이 무모함을 보여 주었다. 산장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비닐로 즉석 비옷을 만들어 입었다.
깜깜해서 앞이 안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 날 둘러싸고 앞을 보여주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떠미는 비바람에 밀려 내려오는 발걸음에는 내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빗방울의 요란함이 간지럼 타는 아기의 웃음만큼이나 싱그럽다.
사거리. 네 갈래의 세석평전에서 조금 더 내려오다 확인한 이정표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앞에 가던 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주 잠깐 의아해 할 때 이미 나는 산에 취해 있었다. 그 상태에서 깊이 생각한다는 건 자신의 판단을 확고히 믿게 되는 마무리작업일 뿐이다. 차츰 구름이 걷히면서 드러난 산길은 동화 속 그림이었고 난 동화속 주인공이 되어 아무 생각이 없다. 바로 눈앞엔 예쁜 꽃들과 나무들이, 고개 들면 멀리 마을과 길과 들이 보인다. 뛰어도 앞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기다려도 뒷사람은 오지 않고 나홀로 가던 길 가는 수밖에 . 맑은 물에 손도 씻고 드문드문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비옷에 대한 찬사도 들으며 그렇게 나름대로 즐겁게 산을 내려온다. 중간 중간에 길이 끊긴 듯 선명히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기라도 한 듯 뿌듯해하며 길을 잡아본다.
거림골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이쯤이면 일찍 내려온 것이겠지. 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빈대떡이라도 먹고 있는 걸까.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고 슬슬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만난 아저씨께 길을 묻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머리가 멍해진다. 뒤늦은 일정표 확인은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절차이고 수습해야 할 문제는 또다시 남아있다. 나의 심각한 표정에 함께 걱정을 해 주던 아저씨의 배려로 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그 크기에 놀라 무서웠던 레미콘 차를 타고 다시 매표소로 올라가 음식점이며 주차장이며 한 번 더 둘러보고 상백무 매표소에 메모를 부탁해 두었다.
시내로 나가는 차가 하루에 두 번밖에 없다는 곳에서 난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다. 나의 얼띤 표정에 마음 좋은 아저씨가 더 걱정이다. 아저씨 회사에 들러 승용차로 바꾸어 타고 진주버스터미널까지 정신없이 달려왔건만 서울행은 모두 매진이고 간신히 대전행 버스표를 쥐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아이들 과자 값이라며 드리자 아저씨는 오히려 차표도 못 끊어준다며 미안해하신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낯선 곳에서 당황해 하는 나를 너무도 편안하게 도와준 그 아저씨께 복을 주셨으면 하고 알고 있는 모든 신께 기도한다. 대전에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간신히 갈아타고 나니 하루가 참 길었구나라는 생각에 몸은 피곤하지만 감사한 날임을 깨닫는다.
서울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 동생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바탕 잔소리를 할 태세이다. “괜찮아 이렇게 무사히 집에 왔잖아. 지리산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덕분에 아름다운 다른 길을 발견했고 즐거웠는걸.”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않다. 무서운 세상이라고. 아니,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앞에 가던 분이 차 한잔 마시러 간 것을 짙은 운무 속에서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혼자만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는 동안은 걱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하산 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행복했다. 그건 그 순간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행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염려해 주었던 그 아저씨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차 시간 때문에 걱정은 했지만 아저씨를 만나 시내로 나올 수 있었기에 크게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간사들이 겁 많은 내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무척이나 불안해했단다.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그 후로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지리산을 두세번 더 다녀왔다. 하지만 이제 일행을 놓치지도 않고 길을 잃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음 좋은 아저씨도 만나지 못한다.
길은 늘 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길을 잃을 수는 없다. 우리가 잃는 건 사람이거나 목적지가 아닐까. 지금 있는 곳이 처음 의도했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지금 가는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2003년 에세이포럼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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