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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유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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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내리는 새벽의 삽화    
글쓴이 : 유시경    12-07-13 01:04    조회 : 4,788
 
거리에 쌓였던 눈무덤이 며칠 새 홈빡 녹아내렸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무작정 내달렸나 보다. 모두가 귀가하는 밤이면 화구의 불빛은 여지없이 잠이 들었고 종종 안개가 거리를 적셨다. 염염(炎炎)했던 정열이 사그라질 때마다 나도 따라 잠들고 싶었다. 쏟아지는 운무, 는개 빗속에 가려진 것들은 쓸쓸하다. 까무룩 흐려지는 느낌. 허전함.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나는 배가 고파진다. 갓 구워진 단팥빵을 한입 베어 먹었으면 좋겠다.
동그란 빵을 두 손으로 감싸면 기분이 좋아진다. 부드러워 좋고 따스워서 좋으며 향내 나서 좋은 빵. 언젠가 일을 끝내고 갑자기 걸어서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 숯불냄새와 재를 뒤집어쓴 채 땀에 전 몸으로 택시를 탔었다. 기사가 거울을 쳐다보며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통닭 튀겨 가시나 봐요?” 라고 물었더랬다. 나는 엉겁결에 “네…… 울 애들이 좋아해서 한 마리 샀는데 냄새가 좀 심하지요?” 라고 멋쩍게 대답하곤 헤죽 웃고 말았지, 아마.
고기냄새를 지우려고 탈취제를 뿌려 중화시켜보지만 차를 타면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만 같아 꽤나 창피하고 조심스럽다. 그래도 어떤 때는 그날처럼 갈비냄새를 통닭냄새로 오인한 것 같은 기사의 눈치가 고맙기만 하다. 몸이 천근같아서 노상 차에 몸을 맡기고 말지만 때론 걷는 것도 필요하단 생각이다. 천근의 쇳덩이만큼 몸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마음의 무게는 만근이 넘는 것일까. 지친 몸과 마음도 더러는 상쾌한 밤이슬에 씻기기를 원하는 듯하다.
네온이 꺼진 상가골목을 홀로 걷는 시간 몇 분은 오늘 하루 내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야 했는가에 대한 반성을 하기에 충분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좋다는 어느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이 혀를 놀려야 했던가. 때때로 마음에도 없는 아첨. 그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해 내 안의 나를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기꺼이 찢어 나눠주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역전시장 입구, 붉은 전등이 간판도 없이 흔들리고 있다. 비탈진 길목을 따라 가지런히 앉은 좌판의 과일들을 내려다본다. 홀아버지 대신 가게를 지키는 그 아이의 어깨를 보고는 과일을 좀 살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시장약국과 BYC, 휴대폰 대리점을 거쳐 <빵빵빵>이라 쓰인 노점 앞을 지나려는데 빵집 여주인이 흘끔 쳐다보고 인사를 건넨다. “벌써 퇴근하세요?” 라는 물음에 “네, 오늘은 좀 일찍 끝났네요.” 라고 대답한다. 왜 걸어가느냐 묻기에 “그냥…… 좀 걷고 싶어서요.” 라고 귀찮은 듯 얼버무린다. 말이라면 오늘도 혓바닥 밑에서 단내가 나도록 너무 많이 쏟아내었다.
객(客)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방석. 끈적이는 외로움의 가닥처럼 홀로 남은 것들의 이야기가 손끝으로 매달린다. 주방과 홀 한가운데, 잔반을 집어삼키는 한 여자를 이 밤은 허공에 붓질해대기 바빴다. 어둠은 늘 바깥풍경에 허기진 단역배우 하나가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오는 삽화를 그려 넣곤 하였다. 연극이 끝난 뒤의 객석처럼 주변은 어지럽혀 있었고 그 여자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아났다.
종일 밥 냄새를 맡아도 배고픔은 남아있는 법. 빵을 보자마자 시장기가 돌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본다. 진열대에 놓인 빵들을 들여다본다. 투명 플라스틱 돔(dome)속에 올망졸망 들어앉은 빵의 모양이 우스꽝스럽다. 마치 저들 스스로 춥거나 배가 고파서 서로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식탁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뒷모습과 울퉁불퉁 울긋불긋 꼭 닮았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축축해진 밤공기에 묻힌 탓인지 빵 특유의 바닐라 향은 사라진지 오래인 듯하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지루한 것. 배가 고플 때 노릿하게 구워진 빵의 유혹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나는 이것저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몇 개 골라서 덮개 밖으로 내놓는다. 단팥이 촘촘히 박혀 있어야 할 것. 그리고 최대한 둥글어야 한다. 둥근 모양만큼이나 마음을 녹여주고 포만감을 주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동그랗게 퍼 담은 밥이야말로 정말 행복하고 따스운 느낌 아니던가. 나는 빨리빨리 달라고 재촉하는 손님들의 손짓처럼 떨고 있는 빵들을 하나둘 주워 담는다.
몇천 원어치 빵을 사들고 담배꽁초가 널브러진 찻길 건널목을 건넌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깜빡이는 가로등 밑에 모여 선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길을 살피며, 내가 그들의 이방인인 듯한 착각이 든다. 집까지 십여 분이면 족하지만 이놈의 걸음걸이는 타박타박 타박네마냥 좀처럼 진도가 나질 않는다. 갑자기 괜히 걸어가나 싶은 후회감이 밀려온다. 바람의 손길이 빠른 속도로 음흉해지는 게 꼭 비라도 동반할 것만 같다. 비닐봉투에서 단팥빵 한 개를 꺼내 포장을 벗긴다. 그러곤 주위를 슬쩍 살펴본 뒤에 봉지를 밤바람에 날려 보낸다. 아무런 제재도 없는 한밤중, 잽싸게 쓰레기를 버리는 이 기교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닐 터이다.
한입 잘근 베어 무는 순간 후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물 젖은 단팥이라선가. 착착 감기는 속맛이 더 눅눅하고 호졸근해지는 느낌이다. 어느 늙은 여가수의 노랫말처럼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가고 싶은 것인가. 안개비는 어느새 가랑비가 되어 호드득호드득 빵 봉투를 적시고 있다. 그리고 굵어진다. 덜 으깨진 단팥빵 속의 팥알 몇 낱처럼 내 두 발의 박동은 여전히 느리기만 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쉬지 않고 뱉어내야 하는 혓바닥의 길이만큼이나 길게 느껴진다. 설령 빗방울이 들을지라도, 두 손으로 감쌀 단팥빵 하나만 있다면 집까지 걸어가는 이 새벽이 그다지 쓸쓸하진 않으리라.
 
- <문학과 의식>2012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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