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무렵부터 일 년에 한번 씩 엄마 아빠를 따라 큰 절에 갔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절에 가기만 하면 새콤 달콤 매콤해서 맛있는 도라지 초무침을 좋아해서 엄마가 밥 위에 얹어 주면 ‘하아 하아’ 매워하면서도 그 많은 밥 한 그릇을 다 먹었었다. 나는 이제 크리스찬이라 절에서 주는 그런 도라지무침을 먹을 기회가 없다. 가끔 집에서 그 맛을 기억하며 도라지무침을 만들어 보지만 어려서 먹었던 그 맛은 절대로 흉내 낼 수가 없다.
초가을 쯤이었던 그 무렵의 저녁은 산에 있는 절이어서 그런지 무척 쌀쌀하고 추웠다. 지루해져서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면, 엄마는 한 입에 들어가지지도 않는 오색 납작 사탕을 입에 물려주고 약과 두, 세개를 주면서 나를 달랬다. 너무 커서 마음대로 빨기 힘들었던 사탕과 씨름하며 입가에 사탕물을 줄줄 흘리다가 어느새 엄마 무릎에 누워 결국은 잠이 든 채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 땐 어려서 그곳에 왜 갔는지도 몰랐다.
큰집엔 아들이 둘이 있었다고 한다. 큰 아들이 어려서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여 살려냈지만 그 후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둘째 아들은 똑똑하고 씩씩하게 잘 자랐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갔다가 휴가 나온 날 밤, 큰엄마가 빈 방이던 오빠 방에 급하게 불을 땠는데 그만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오빠가 죽었단다. 그래서 절에다가 오빠 제사를 모셨고 엄마는 몇 년간 오빠 제사에 막내인 나를 데려 가셨던 것이다. 큰엄마는 전주 이씨 왕손으로 열아홉에 몸종 달고 시집을 오셨던 분이고 엄마와는 동서지간이면서도 고종사촌 간이어서 더 특별한 사이였다. 그러고 보니 절에 갔을 때 엄마와 큰엄마가 항상 우셨던 것 같다.
그 이후로 큰 집으로부터 아들이 셋이나 되는 우리 집의 막내 오빠를 양자로 달라는 청이 몇 차례 있었지만 엄마 아빠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막내 오빠는 엄마 아빠께 혼날 때 마다 “왜 나를 큰 집으로 안 보냈냐” 며 엄마 아빠를 곤혹스럽게 했다.
아무튼 큰아버지는 그 사고 이후로 두 번째 큰 어머니를 얻으셨다. 지방에서 유지로 계신 당신의 수많은 재산을 지키고 제사도 모셔 줄 대를 이을 아들이 꼭 필요하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그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큰아버지는 초조히 아들을 기다리셨건만 연거푸 딸만 셋이나 낳게 되자 다시 젊은 세 번째 큰어머니를 얻으시고 드디어 득남을 하셨다. 세 번째 큰어머니가 줄줄이 아들 둘을 낳으시자, 둘째 큰 어머니도 그제서야 시샘 하듯 연달아 아들을 둘이나 낳으셨다. 그렇게 양쪽의 출산 경쟁은 아들 넷과 딸 넷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서울에 사셨던 큰엄마는 두 번째 큰어머니가 낳으신 첫딸을 서울로 데려다가 친딸이라고 속이고 키우셨지만 외모도 안닮은 데다가 연로하시니 결국 사춘기 때 출생의 비밀은 다 밝혀지고야 말았다.
큰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재혼으로 시집오셨던 두 번째 큰어머니를 제일 좋아 하셨다. 초혼의 새색시인데도 그닥 사랑을 받지 못한 젊고 똑똑한 셋째 큰어머니는 양조장을 경영하시면서 재산 늘리는 재미로 낙을 삼으셨던 것 같다. 지방에서 둘째, 셋째 큰어머니와 사셨던 큰아버지는 어쩌다 서울에 오셔서도 큰엄마와는 한방에서 주무시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 큰아버지에 대해 푸념을 하시면서도 늘 큰아버지를 그리워 하셨던 큰엄마.
큰엄마는 자식 잃은 상처를 혼자 떠안고 함께 위로해줘야 할 남편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첩질을 해도 항변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여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셨던 것 같다. 사십대 중반에 졸지에 자식 잃고 남편을 뺏긴 큰엄마는 무슨 낙으로 시름을 달래며 사셨을까? 자식을 잃은 상실감과 자식이 있다고 유세하는 둘째, 셋째 큰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멸시도 있었을 텐데 평생을 당신 혼자 뼈아픈 슬픔과 서러움을 토해내면서도 큰엄마는 그런 모든 것들을 잘 인내해 내셨다.
지구촌에 아직도 쿠웨이트와 같은 일부다처의 국가가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그런 곳에서는 그나마 공평한 대우가 존재한다니 큰엄마는 차라리 제도적인 법으로라도 공평한 대우를 보장 해주는 일부다처제의 국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 큰엄마가 그런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돌아가신 것은 어쩌면 다행인걸까.
어릴적 절에서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잠들었던 나도 어느덧 딸아이를 시집보낼 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이만큼 살아보니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만큼 중요한 가치가 또 무엇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에도 남편과 아내는 서로 변함없이 사랑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결혼식에서 누구나 듣게 되는 이 쉽고도 지당한 주례사의 구절이 살아갈수록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가를 나 자신도 인생의 고비마다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것들을 잘 지키며 끝까지 성공적으로 살아내는 모든 부부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상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