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 산책하기에 좋은 날이 아니다. 그래도 데리고 나가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천진스런 샌디의 눈과 마주치면 나는 그만 마음이 약해져 그를 외면할 수가 없다. 나갔다 오면 또 목욕을 시켜줘야 될텐데... 산책용 티셔츠를 입히고 용변봉투를 챙기고 목줄을 해주는 동안 샌디는 흥분을 감추질 못하고 겅중거린다.
샌디는 올해로 만 3년이 된 골든 리트리버 종이다. 골든 리트리버 종은 영국 산으로 털 색깔은 황갈색이고 몸무게 20g∼30kg에 키는 54cm∼64cm정도의 덩치가 큰 개이다. 만일 생후 3개월부터 안내견으로 훈련을 받았다면 지금쯤 우리 샌디도 어느 맹인의 길을 안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다 보면 크던 작던 누구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인간에게 실망하여 언제나 변치 않고 신실하게 있어주는 동물들에게만 마음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바로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들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집착하는 행위가 일종의 정신병적 증상이 된 경우인 것이다.
그들이 동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물의 생활환경이나 여건 등을 이성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채 동물들을 수집하는 데에만 집착하여 사육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문제점이다. 자신이 돌볼 수 있는 범주를 넘는 수의 동물을 기르는 애니멀 호더들의 이러한 동물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자신이 키우는 동물들을 결국 방임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학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고 한다. 그런 동물 수집광들을 애니멀 호더라고 한다. 'hoard'의 사전적 의미는 '비축[저장]물'(특히 비밀 장소에 모아 놓은 많은 돈, 음식, 귀중품 등), 또는 '(몰래)저장하다', '(물건 등을 품귀 때에)사쟁이다'라는 뜻이다.
언젠가 S.O.S 방송에 신고 된 장면을 보았는데 어느 애니멀 호더의 집에는 50여 마리가 되는 개들 때문에 정작 가족들은 있을 공간이 없어 누군가가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가족들이 방송국에 신청을 한 것 같았다. 이미 옆에서는 개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나머지 개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 프로는 제작진이 '애니멀 호더'인 주인여자에게 전문가를 대동하고 찾아가 그녀를 설득해서 결국은 안전하고 위생적인 시설로 개들을 보내기로 합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가정폭력으로 이혼하게 된 후부터 애니멀 호더가 되었다는 그 여자는 어쩌다 인간과의 신뢰에는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까.
미국 콜로라도대학 진화생물학자 마크 베코프는 2009년 5월 ≪야생의 정의(Wild Justice)≫라는 저서의 부제를 '동물의 도덕적 삶'이라고 붙였다. 그는 그 책에서 개들을 '도덕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는 '윤리적 동물'이라고 주장했다.
실험관찰 결과, 개들은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놀이를 통해 서로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그들 집단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래서 개들의 놀이가 싸움으로 확대되지 않는 데는 다음의 네 가지 규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놀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한다는 것이다.
앞다리는 웅크리면서 뒷발은 세우는 자세로 놀아달라는 의사를 전달한다고 한다.
둘째,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능력을 감안해 스스로 불리한 입장이 되게 하거나 역할을 바꾸어 주어 상대와 대등한 입장이 되도록 노력해 준다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등 실수를 하면 앞다리를 웅크리고 앉아서 '미안하다, 제발 더 놀아 달라. 앞으로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관용을 베푸는 행동을 자주 표현한다고 한다.
넷째, 정직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잘못했는데 잘못을 뉘우치지 않거나 불공정한 행동을 계속하면 그 개는 집단에서 쫒겨나게 되고 그러면 수명도 단축된다고 한다. 자신의 생존의 기회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라도 엄격한 규칙을 따라 페어플레이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도 질서의식과 단체 활동에 부적합한 돌발행동이 많이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개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 지키기'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애니멀 호더'로 내 몰고 있는 우리의 인간사회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 준다.
우리 집 '샌디'를 보면서 나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때론 부럽다. 나이 듦에 따라 나를 먼저 주장하는 것이 어쩐지 미성숙한 듯하여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왔던가. 화가 났을 땐 화가 났다고, 질투가 날 땐 질투가 난다고, 나도 먹고 싶다고... 본능에 충실한 듯 거침없는 감정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못내 그녀가 부러운 것이다.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며 배신하지 않는 개들. 나도 가끔 상처받을 때면 개들보다 못한 인간들에게 실망한다. 그래서 오죽하면 '에니멀 호더'들이 되는지를 알 것 같기도 같다.
한번 마음 주면 변치 않는 것이 동물들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상처받은 '에니멀 호더'들을 생각하며 쉽게 변질되는 우리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간관계들을 생각해본다. 나 자신부터 누군가에게 가해자는 아닌지 점검해 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좀 숙연해진다. 고의든 아니든 더러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기에 우리는 그래서 남 탓만 하고 살 수 없는 것 같다. 단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오늘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