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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배우는 태어나는 것인가? - 배우 이병헌에 대한 몇 가지 기억    
글쓴이 : 조헌    12-10-29 19:02    조회 : 4,813
명배우는 태어나는 것인가
-배우 이병헌에 대한 몇 가지 기억-

                                                                         조     헌

 “선생님! 끝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일순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서울 중동고등학교 3학년 교실, 방금 전 강당에서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을 교실로 인솔해 온 나는 담임으로서 마지막 종례(終禮)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교실 뒤에는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나는 함께 보낸 지난 1년간의 감회와 이젠 학교를 떠나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간단한 덕담(德談)을 전하고 이어서 졸업앨범과 상장 그리고 학교에서 마련한 기념품 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 한 사람씩 교탁 앞으로 불러내 졸업장을 건네주면서 일일이 악수를 청해 작별인사를 대신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그의 행동은 정말 뜬금없는 거였다. 나는 평소 우스갯소릴 잘 하는 그가 무슨 엉뚱한 소릴 하려고 저러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혹시 난처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먼저 머릿속을 스쳤다.

 재학 중, 그는 매우 흥미로운 학생이었다. 비교적 성적이 좋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할 때도 우물쭈물하지 않았고 대하는 사람에게도 항상 늡늡하고 당당해 사내답고 자신감이 넘쳤다. 게다가 적당한 크기의 다부진 체격과 실제보다 다소 크게 행동하는 몸짓은 뭇사람의 주목을 자주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잊히지 않는 것은 뚜렷한 이목구비로 짙은 인상을 남기는 그의 얼굴과 그 얼굴이 짓는 다채로운 표정들이었다. 문학과목을 강의하던 나는 종종 그가 짓는 표정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감동어린 시를 읽거나 소설의 극적인 장면을 설명할 때, 변화무쌍한 그의 표정은 남들보다 훨씬 미묘했으며 끊임없이 바뀌었다.
 더욱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라든지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여름이라면 이미지가 많이 달라질까요?’라고 작품해석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면 종종 던지는 기발한 그의 질문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쉬는 시간이면 번번이 당시 유행하던 브레이크 댄스를 신나게 춰 옆 반 학생들까지 몰아오는 등, 교실 안을 한바탕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저는 꼭 불문과를 갈 거예요. 아트 디자이너가 꿈이기 때문에 파리로 유학 갈 생각이거든요.” 학기 초 상담시간에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뜻밖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2외국어가 독일어뿐이어서 그는 프랑스어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였기에 내신 성적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남학생이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극구 만류했었다. 하지만 ‘전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던 그는 기어이 쓴잔을 마셔야 했고 부득불 한 해 더 고생을 해야 했다.
 그가 재수(再修)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말,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을 하려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내 앞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그냥 선생님이 뵙고 싶어 왔어요.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강강했던 그전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풀기가 쭉 빠진 모습이었다. 짙은 색 잠바마저 초췌한 그의 표정을 돕고 있었다.
 난 그의 등을 다독이며 근처 중국집으로 데려 갔다. 궂은 날씨보다 더 스산한 그의 맘을 녹이기엔 따끈한 짬뽕국물이 안성맞춤이었다.
 “대학은 여전히 불문과를 가겠지만, 배우가 되어 연기(演技)가 하고 싶어요. 정말 잘 할 자신 있어요.” 느닷없지만 조심스레 던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그가 평소에 하는 말조차 마치 배우의 대사처럼 높낮이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그 생각이 괜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일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2년이 조금 넘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저 KBS 탤런트 공채시험에 합격했어요.” 연수원에서 지금 교육중이라는 그의 전화목소리는 몹시 들떠 있었다. 재수를 마치고 한양대 불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쯤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유안진 원작)라는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연기자로서 탄탄히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세세히 알려주며 언제나 살갑게 내 안부를 챙기는 사람이 그다. 혼을 담은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연기자! 그가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배우 이병헌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는 손을 들고 있는 그를 지목하며 태연한 척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남학교 교실에선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감정을 잡아가며 연극배우처럼 뇌인 그는 주변의 동조(同調)를 구하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교실 안에 있던 학생과 학부모 모두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색해 몸 둘 바를 모르던 나도 가슴 한쪽이 뭉클하며 뿌듯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삽시간에 교실 안을 감동의 무대로 만든 그는 찡끗거리며 웃는 그만의 특유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평범한 자리를 특별한 감동의 장으로 연출할 수 있는 능력, 분명 그것은 그만의 독특한 재주임에 틀림없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집념과 노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가 이미 출연한 많은 작품 속에서 그가 해석하고 만들어낸 인물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무심코 손만 흔들어도 그게 바로 춤이 되는 무용가처럼, 아니면 입에서 쏟아내면 그대로 시가 되는 천부적 시인처럼 아마 그는 노력이전에 이미 배우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제자의 양양한 전도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책과 인생> 2012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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