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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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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다    
글쓴이 : 김형자    12-11-04 22:51    조회 : 4,153
흔들리다
 
                                                                                                                                              김형자
 
 
 출근하기엔 이른 시각인데 서둘러 집을 나선다. 첫 한파가 지나간 휑한 길 위에 서자 온 몸의 뼈들이 일제히 움츠러든다. 굽은 등으로 양버즘나무 즐비한 길을 땅만 보며 걷는데 난데없이 큼직한 물방울이 내딛는 발 앞으로 투실 떨어진다. 화들짝 놀라 마른하늘을 올려보는데 빈가지에서 볼일을 시원스레 마친 까치가 별일 아니라는 듯 게으른 날갯짓으로 멀어진다. 녀석의 꽁무니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쓴 코웃음을 내뱉는다.
 
 수능이 끝나자 반쯤 고삐 풀린 학생들까지 합세한 버스와 전철 안은 샅바 없는 치열한 씨름판이다. 환승역에선 헐렁해지겠지 안간힘으로 버티는데 숨고를 사이도 없이 또 한바탕 밀어닥친다. 팔꿈치와 가방 모서리와 경직된 살점들에 눌려 숨쉬기조차 아득해질 때 삶이 전쟁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한 지 3개월째다. 세간을 줄여서 좁은 집으로 이사 온 후로 웃음도 대화도 말라버린 그 즈음부터다. 남자들의 부엌 출입은 맞벌이 가정뿐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건만 굶으면 굶었지 숟가락 하나 챙길 줄 몰랐던 그였기에 내겐 감동보다는 충격에 가깝다. 가혹한 체벌(?)인가 싶다가도 말랑한 내 마음을 낚기 위한 미끼려니 하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의 일방적인 침묵시위가 길어지면서 그의 설거지도 길어진 셈이다. 출근시각에 쫓기며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삶이 전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실감했었다.
 달리는 전철이 신경질 부리듯 쇳소리를 길게 내지르더니 부르르 몸통을 흔든다. 미어터질 것 같은 사각밀폐 칸에 버려진 옷가지처럼 끼어있던 몸뚱이들도 이리저리 맥없이 흔들린다. 한바탕 흔들리고 나자 밀착된 몸뚱이들은 서로 친해진 양 얌전하고 편안하다. 검불과 뒤엉킨 곡식 알갱이들이 몇 번 키질에 시달리고 나면 제자리를 찾아 가지런해지듯이.
어젯밤 두통과 몸살로 뒤척이다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곤히 자다가 설핏 잠이 깼는데 문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느리고, 둔탁한 울림의 반복. 도둑인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며 문틈으로 바싹 다가서는데 맞은 쪽 남편 방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환했다. 새벽 두 시 가까운데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새로운 불안감에 휩싸였다. 짐을 싸는 중일까?
“차라리 떠나버려!”
 연이은 사업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야망에 집착하는 고집불통 그에게 내질렀던 한마디가 감기는 눈꺼풀 위에서 끈질기도록 서성거렸다.
“어~라?”
 아침에 남편 방으로 건너간 작은 녀석의 갈라진 목소리 너머로 쌍무지개가 걸린듯했다. 가자미눈으로 남편의 방을 몰래 훔쳐보았다. 거만한 바벨탑처럼 창문을 가로막아선 높은 가구들이 키 재기를 낮춘 방은 아늑한 빛이 감돌았다. ‘좁아터진 집구석’이라고 주절거렸던 주방에도 새 수납장이 자리를 잡았다.
 피곤에 찌든 일상처럼 눌러 붙은 바닥이나 타일의 기름때도 말끔했다. 좁은 건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넓어 보였다. 내가 까맣게 잠든 밤에 그는 폐허 같은 작은 공간에서 희망의 퍼즐을 맞추고 있었나보다. 전선 타래처럼 복잡하던 머릿속의 팽팽한 신경 하나가 끊어지더니 이름 지을 수 없는 날숨 되어 뻑뻑한 가슴을 흔들며 새어나왔다. 결국 흔들린 것일까?
 기다림과 흔들림으로 견뎌온 위기의 날들이었다. 무엇을 기다렸던 걸까. 강 어구에 서있는 갈대처럼 바람을 기다렸던 것일까. 피할 수 없는 바람이기에 별 수 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삶이란 견디는 것. 그다지 특별하지 않는 것. 그래서 별일 아닌 것. 그래도 아름다운 것.
 갈대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우두커니 서있는 갈대에게 바람은 은빛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꺾이지 않고 온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는 갈대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때론 설레는, 때론 아픈 바람이 있어 갈대는 아름다운 것이다.
 
 은빛 물결 인파가 수증기처럼 지상으로 빠져나간다. 인파에 밀려 흐르듯 층계를 오르면서 내일이 그의 마흔 여덟 번째 생일임을 기억한다. 퇴근길에 그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준비해야지. 지잉 지잉, 휴대폰 벨이 울린다. 햇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남편의 반짝거리는 수다에 내 입 꼬리도 덩달아 춤을 춘다. 공기관의 최종 심사에서 우리 업체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남편의 설거지하는 모습일랑 보기 힘들겠구나. 산다는 일은 그런 것. 별일 아닌 게다.                   
 (2008.4월 <에세이플러스>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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