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대한 斷想
-다름과 틀림
"지금 여러분 지갑에 의류를 구매할 돈이 백만 원씩 들어 있습니다."
약 백여 명 정도의 직원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별과 연령대가 사뭇 다른 교육생들은 대졸학력의 직장경력이 최소 이삼 년 이상에서 길게는 십여 년 경력자들이었다.
"A그룹 대 B그룹,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만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지루함을 떨쳐내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주목했다.
"A그룹, 한 벌을 사더라도 백화점에 가서 브랜드가 좀 알려진 옷을 선택한다."
벌써 몇몇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B그룹, 동평화시장이면 어떠냐! 실속 있게 여러 벌 구매하여 코디하여 입을 거다."
약 3 대 7의 비율로 A그룹 대 B그룹이 정해졌다.
자리를 다시 배치하여 브랜드파 A 한 명에 실속파 B 두 명씩 짝을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약 20분을 주고 서로 상대방의 옷 구매 취향을 자신의 취향으로 바꾸도록 설득해 보라 했다. 설득하는 사람, 당하고 있는 사람들로 교육실은 금세 도떼기시장이 되어버렸다. 와글와글, 모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드디어 약속한 20분이 지나갔다.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고, 눈을 감아 달라 했다. 조용해진 교육실에는 열띤 토론으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숨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설득으로 상대방의 옷 구매 취향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용히 손만 들어주세요."
꽤 자신 있게 올라간 손이 7-8명 정도 되었다. 아직 모두 눈을 감은 채여서 교육자만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이의 설득을 받아들여 자신의 취향을 바꾼 사람이 손을 드시는 겁니다."
과연 자신이 설득 당하였다고 손을 든 사람이 몇 명이었을까?
"설득 당한 사람들은 그대로 손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 눈을 뜨세요."
모두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특히 자신이 설득한 상대방을 눈으로 찾아 확인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득 당했다고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업 교육부서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직장 내에서 직원 간의 예의와 배려에 관한 문화를 짚던 시간이었다.
그렇듯 성인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무슨 정치나 종교 같은 인생의 중차대한 가치관에 관한 문제도 아니었다. 정말 옷을 살 돈을 손에 쥔 것도 아니고, 다만 옷을 산다는 가정 하에 자신의 기호를 단 두 개의 조건 중 택일하게 하였을 뿐인데 모두 열렬히 자신의 기호를 상대방에게 설득하려 애를 썼다. 또한 아무도 설득당하지 않고 자신의 기호를 사수했던 것이다.
같은 사무실 내에서 늘 얼굴을 맞대는 동료끼리 정치, 종교, 관습 등으로 소중히 자신이 지켜온 가치관을 공격받는다든지, 그 가치관을 바꾸도록 종용받거나 그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무시당하거나 할 때 과연 상호 간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질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교육시간이었다.
얼마 전 아들이 급하고 중요한 용무가 있어 오클랜드 대학교 교정을 서둘러 가로지르고 있을 때 동양계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서툰 영어로 서두를 떼더니 한국 학생인가 묻기에 그렇다고 하자 바로 기독교 전교를 시작했다. 다음 학기 등록 등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촉박하던 아이는 몇 번인가 중간에 그런 의사를 비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교정에 서서 30 여분을‘한국식 기독교 전교’를 당하고, 다른 종교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의사표현도 무시된 채, 인적사항을 달라는 요구를 받아야 했다. 오랜 외국생활로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서양식 사고가 익숙한 아이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나라에서도 집으로 전교 책자를 들고 오는 이들이 가끔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한국에서도 자주 보던 모 종교의 책자를 들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평소에는 냉담자이면서 그럴 때는 종교를 판다. 다른 종교가 있어서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책은 읽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미안해서 그리하겠다고 했더니 출신국을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하자 한국어 책을 찾아서 건네주고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서는데 우리 집 문밖에는 그녀의 남편과 유모차를 탄 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자신의 종교를 위한 나들이를 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문밖까지 나가 유모차의 아기를 예쁘다 어르고 남편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타인의 종교를 존중하는 이들은 대개 뉴질랜더들이다.
한국에서 같은 책자를 들고 전교를 하던 이들이 생각난다. 다른 종교가 있어 개종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애초에 무시되었다. 집으로 찾아오면 무작정 밀고 들어와 상대방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시간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리는지 피해의식까지 생길 정도였다.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종교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판단이 든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종교뿐 아니라 정치 또는 관습 등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보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 한국산문 201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