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빠진 년과 뒤틀린 년의 동거
이 민
70대 후반 노인의 간을 대부분 잘라내야 한다고 의사가 5명의 자식들에게 말했다.
"비정형 세포가 담관 쪽에 있어 수술을 하면 간의 4분의 3정도를 잘라내야 합니다. 젊은 사람도 이겨내기 힘든 대수술이고, 수술해도 생존율은 그리 높지 못합니다."
할 거요 말거요 식의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엄마의 생과 사에 대한 비율을 말해줬다.
자식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엄마 몸을 가지고, 그 엄마를 빨아먹고 살 파먹어 사람 된 자식들끼리 모여 엄마 모르게 의논했다.
막내가 울며 말했다.
"수술을 안해야 조금이라도 더 사실 거 아니야....난 반대야."
수술실 들어가시던 모습으로 영영 이별했던 시어머니 생각이 눈앞에 스쳐 나도 반대라고 강하게 말했다.
제각각 나이만큼씩 주워들은 예를 들며 엄마 살리는 경우의 수를 얘기했다.
결국 간은 그대로 두고, 말썽이 심했던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만 하기로 결정하여, 알 수 없는 기간일지라도 엄마의 죽음을 유보시켜 드리기로 자식들은 합의했다.
쓸개만 떼어내면 건강 찾는다는 각본을 엄마에게 들려드렸고 동의를 얻어 내시경으로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만 하게 되었다. 그것조차도 너무 무서워하셨다.
수술 날. 내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회의와 수술 시간이 쌍알 나버리는 바람에 난 수술 시간에 엄마를 보러갈 수 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회의 시간이니 천천히 움직인들 문제될 게 없었지만 괜히 몸동작이 서둘러졌다.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맘을 끌고 회사로 향한 몸이 오죽했으랴.
회사에 도착해 차를 대고 나오는 중에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건성 대답하며 바닥에 다리를 짚는데 휘까닥 발목이 돌아가 접질려 버렸다. 스커트 입고 잘난 척 내뻗으려던 다리는, 새빨간 하이힐을 내 던지며 제 엄마도 아닌 시멘트 바닥에 잘못을 빌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말 배우고 난 이래 급할 때면 언제나 같았던 외마디 비명 "엄마얏!"을 내지르며.
목울대 밑에서 며칠째 기다리던 울음이 '때는 요 때다.'하며 밀고 올라와 터지려했다. 주변 때문에 꾹 참았더니 다친 다리보다도 울대 밑이 찢어질듯 아팠다.
부축을 받고 사무실에 올라가니 그새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소염스프레이 떡칠하고 압박붕대를 몇 겹 돌려 묶어 약식 깁스를 스스로 했다. 그리고 다시 하이힐을 신었다.
모양은 이랬다. 짧은 치마 밑 발목엔 압박붕대를 칭칭 감은 채 빨간 하이힐 신고 또각또각. 쩔뚝이지도 않고 걸어 들어가 아무런 내색 없이 회의를 마치고 나왔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엄마는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도 깨어나 온통 주렁주렁 주사액을 매달고 회복실에서 병실로 막 옮기신 터였다.
죽음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마취 순간에 이를 너무 악물어 생니가 두 개나 빠져 버리셨다.
엄마는 큰 딸년과 눈이 마주치자 우셨다.
"나 살아난 거지...."
제대로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도 않는 말로 계속 그 말을 하셨다.
"어....엄마....잘했어....용해.....이제 맘 놓고 더 주무셔요."
다시 정신 못 차리시더니 아주 한참 만에 깨어나셔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물으셨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라니?"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요. 쓸개 빠진 년으로 살아가는 거지. 흐흐..."
"진짜 그러네. 난 이제 쓸개 빠진 년이네."
아픈 시어머니를 불편해하는 집사람 때문에 난감해 하고 있는 오빠가 안쓰러워 퇴원 후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간병인과 문병오시는 친지들에게 맡기고 우리 내외는 둘 다 직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엄마한테 미안했지만 내 맘 편하자고 그냥 모셔와 버렸다.
그렇게 해서 쓸개 빠진 년과 다리 뒤틀린 년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역할이 많아 몸과 시간을 찢어야만 하는 다리 뒤틀린 딸년은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움직인다고 한의사한테 혼나가며, 찔러대는 침 맞아가며, 발목에 압박붕대 매고 높은 구두 신은 채 어디로 어디로 싸다니느라 병든 엄마 봉양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쓸개 빠진 년은 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판에 자식이 무엇이라고 채 손 못 미쳐 먼지 쌓인 살림이 자신의 죄이기라도 한양 사위에게 미안해하며 살림을 만지기 시작하셨다.
베란다에 뭉텅 던져만 놓았던 야생화들을 요리 조리 얼굴 맞춰 아침마다 까르륵 피어나게 하는 재주도 부려주시고, 작은 연못 하나 있는 것 물 빼어 버린 지 오래였는데 엄마 손 닿으니 물레방아 철떡철떡 잘도 돌아가고, 몇 년째 옥수수 대처럼 볼품없던 문주란에 왕관 같은 꽃대도 올라오게 하셨다.
사위와 같이 티브이 연속극 보다가 역사를 얘기해 주시면, 모두 아는 내용일 텐데 세상 처음 듣는 얘기인양 신기해하며 들어주고 있는 내 남편의 기특함도 내게 알게 해 주셨다.
그러나 천년만년 엄마와 이렇게 행복한 동거를 하고 싶다고 오래오래 살아 달라는 말을 뿜어대던 딸년이 한 달도 채 안되어 변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살림살이 간섭에 짜증이 났다. 엄마 품 떠나온 지 20년이 넘다보니 엄마와 식성이 많이 달라져 있어서 엄마의 방식으로 만드신 음식들도 덜 맛있었고, 내가 정해 준 각 살림살이의 자리들이 엄마 따라 이리로 저리로 움직여 어질러지는 것도 거슬렸다. 본인은 물론 모르셨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가 온 살림을 다 하려 덤비는 것도 맘이 아프고 싫었다.
자식이란 종자들은 원체 제 껍데기 알기를 우습게 알지 않던가.
다리만 뒤틀린 게 아니라 심보도 뒤틀어졌는지, 그런 마음을 좋게 얘기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참말 여러 가지 조잡한 모양으로 아무렇게나 엄마에게 내밀었던 것 같다.
엄마가 못난 딸년의 심사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젠 살만해졌으니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쓸개 빠진 년과 뒤틀린 년의 동거는 한 달을 겨우 채우고서 끝이 났다.
그렇게 엄마를 집으로 보낸 주제에, 나는 일 년일지, 그보다 적은 시간일지, 노인은 어떤 병 진행도 더디다니 좀 더 긴 시간일지 모르지만 엄마와의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다. 밖에 나와 일하고 부딪치면 쓸개 빠진 엄마보다 일이 먼저가 되는 딸년이 입은 참 잘도 나발린다.
계간 <시에> 2012년 봄지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