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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소리    
글쓴이 : 이민    12-04-29 09:46    조회 : 9,239
 
 
북 소리
                                                                                                                                  이 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소리를 표현할 때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한다. 나도 두어 달 전까지는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새로이 알아졌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북 소리는 심장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심장이 제 소리를 내어 다른 곳을 두드리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북을 쳐 보니 자꾸 삼키려 해도 속절없이 두둥! 두둥! 하며 내 심장의 소리가 목 부근을 쳐대기도 하고, 쓰지 않아 퇴화되었던 내 머리 어느 한 부분을 강하게 쳐서 다시 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전류가 깨어나게도 했다. 그리고 때론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을 잘 채어 둥근 소리로 맛깔나게 두근두근 버무리다가 때론 사내의 기백 같은 벅찬 소리가 되어 힘차게 치올라가던 그 북 소리는, 소리가 갈 수 있는 기존의 틀을 답습하던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고, 내 안 깊숙한 곳으로 잦아들던 자신감을 두드려 인생의 씩씩한 멋과 그 화합의 묘미를 터득하게도 하더라.


두어 달 전, 한국산문작가협회 연말 송년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난타 북' 공연을 하기로 했다며 같이 참여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난타 북' 이란 말을 듣는 순간 신 것을 봤을 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조건반사가 일어나 이태 전 보았던 공연 <난타>에서의 감동의 북 소리가 머리 안을 두들기며 돌았다. 나는 시간적 여유라든가 하는 내 형편에 대해 가늠할 여지도 없이 단박에 그러겠다고 대답부터 했다. 대답을 하고나니 북을 친다는 생각에 이미 나는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 송만갑과 북을 매개로 교감하는 예술혼의 기쁨을 노래한 시〈북〉에서 북채를 잡고 있는 김영랑 시인이라도 된 양 기분이 좋아져 마음 속 입 꼬리가 뺨 한가운데로 치올라갔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은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김영랑 작시 <북>전문)



그러나 북의 명인 김영랑 시인이 제시한 활기차고 신명 난 굿거리장단은 오직 영랑과 만갑의 몫, <난타> 공연자들의 감동의 북 소리는 그들의 몫일 뿐, 정작 새 북채를 한 벌씩 쥐고 처음 북 앞에 섰던 나와 '난타 북'의 의기투합한 자 일곱 명 우리는 소리는커녕 나무로 짠 통을 뒤집어 쓴 가죽에 북채를 들이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오합지졸들이었다.
나는 어떤 것을 모르는 이에게 모르는 그 어떤 것을 가르쳐 알게 해주는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을 존경한다. 북채를 손에 쥔 것만으로도 어깨에 쥐가 올라 팔을 못 쓰는 오합지졸들에게 북을 쳐서 가락을 만들고 종간엔 심장이 소리를 내어 밝고 원만한 인생의 조화를 두드리게까지 하려니 수천 번 토악질도 났으련만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웃음으로 가르쳐 준 우리의 북 선생님에게도 존경을 표한다.
북을 치기 위한 악보가 따로 있다. 우리에게 악보를 가르쳐 그 악보대로 소리를 만들어 낼 재간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안 선생님은, 소리를 표기하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대단한 업적을 차용해서 우리를 가르쳤다. 북을 쳐서 낼 소리를 한글로 써주고 우리에게 북은 치지 않고 입으로만 그것을 읊게 했고, 우리는 북은 서툴지만 입으로 소리 내는 것이야 평생 하던 것인데 그깟 것 못할 소냐 하면서 세기의 강약까지 넣어 입 가락을 쳐댔다.


"딱! 두구두구두구, 뚜구두구 뚜구두구, 둥! 둥! 두구두구 뚜구두구두구두구........"


사람의 오감은 서로 내통하는 게 맞다. 눈으로 본 대로 입 가락으로 노래한 소리는 인지와 기억 기능을 조절하는 측두엽의 청각 조절 중추를 두드려 우리로 하여금 입에서 내는 소리와 똑같이 북을 치게 했다. 거기에 '별달거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가락을 배울 때는 드디어 심장이 둥! 둥! 소리를 내 보내기 시작했고 그 신호를 받은 몸 안의 촉각들이 다 들고 일어나 깨춤을 추게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가락을 익혔고 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A팀 B팀으로 나뉘어 가락을 주고받는 부분에서 우린 서로 영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정해진 가락의 길이 안에 서로 다른 소리로 화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주는 게 빠르거나 받는 게 느리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계속되었다. 내 코가 석자이니 다른 팀이 어떠한 소리로 시작하는 지 챙길 겨를이 없었다. 당연히 그 부분만 되면 소리는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방법은 연습으로 조화를 맞춰야 하는 것인데 그조차 쉽지가 않았다.
또 하나, 여러 가지의 가락을 한 묶음으로 묶어 여덟 번을 연이어 쳐야 하는데 치다보면 가락이 엉키지 않게 하는 것만도 겨워서 여섯 번이었는지 일곱 번이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거였다. 그러면 나는 여섯 번을 친 채 다음 가락으로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내 음을 듣고 따라오게 되어 제대로 가락을 치고 있던 사람과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게 되어버렸다.
궁여지책으로 우리는 그 부분에서 어떤 표시를 주기로 했다. 제 북을 보지 말고 상대 팀의 얼굴을 보고 알아채 서로 맞추는 걸로 하자고 의논했고 그대로 연습했다.
연습대로 되어 어느 정도 서로에게 맞춰지던 어느 날, 여덟 번째 묶음을 치기 전 다른 팀의 표정을 보려고 고개를 돌려 한 사람과 얼굴이 마주쳤을 때, 나는 학문으로만 배워 그저 알기만 했던 이치를 깨닫게 되었으니 아!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山)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염화(拈華)]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미소(微笑)]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출처《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나와 마주 한 그녀의 눈빛을 포함한 얼굴 전체가 '여더얼'이라 하며 연꽃을 비트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빙긋이 답을 해 주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석가였고 나는 가섭이었다. 석가와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 이치를 그 순간에 보았던 것이다.
이치를 깨달아 석가가 되고 가섭이 된 마당에 서로를 맞추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 우리는 그것을 틀려본 적이 없었다.
우리들 깐에는 '난타 북'을 배우기 이전보다 씩씩해진 우리를 자찬했고 우리의 화합이 진하다는 것을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었으며 무대에서 공연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마음이 충분히 전해져 오는 경우가 있다. 거의 나의 마음과 같은 무늬를 가졌다거나 그들의 문양이 나의 맘에 맞는다거나 일건데 그럴 때 나의 느낌은 드물게 만나지는 동종(同種)을 알아채는 기쁨이다.
어떤 말이 오고가도 오고 간 말과 상관없이 교류되는 동종간의 텔레파시.
동종이 되어 같이 만들어 낸 북소리와 함께 보낸 두어 달은 가만히 바라만 봐도 '빙긋이 웃음이 나오는' 그 느낌이 가슴 미어지는 사랑보다 좋았던 그런 날들이었다.


<한국산문> 2012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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