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도 맹수(猛獸)인가요?
조 헌
돼지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우지끈하고 수돗간 기둥 하나가 부러져 나가자 지붕이 폭삭 내려앉았다. 돼지 잡는 것을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군인들 중 수돗간 밑에 섰던 몇은 순식간에 무너진 지붕에 깔려 흙먼지 속에서 허우적댔고, 도끼로 정수리를 찍힌 돼지는 미친 듯 날뛰었다. 혼비백산한 군인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는 북새통속에 그만 모두 혼쭐이 났고 엄청난 난리를 겪은 듯, 이 일은 한동안 부대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심심찮은 화젯거리를 제공했다.
“조병장님! 조금 있다가 막사 뒤 언덕에서 돼질 잡는다내요. 우리부대 잔반(殘飯)을 가져가는 농가에서 송아지만한 돼지를 보내왔대요. 이따 구경 한번 안하실래요.” 토요일 오후, 제대가 보름도 남지 않은 나에게 신상병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잡을 거냐고 묻자 취사반 이병장을 지목하며 고향서 몇 번 잡는 걸 보았다는데 제대로 해 낼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했다. 직접 잡아본 것도 아니고 그저 서너 번 옆에서 보기만 했다니 평상시 껍적대길 잘 하는 이병장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도 못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이윽고 막사 뒤가 떠들썩하며 술렁이자 재촉하는 신상병의 성화를 못 이겨 따라 나섰다. 실로 엄청나게 큰 돼지가 기둥에 묶인 채, 공포에 질린 듯 버둥거렸고 군인들은 뺑 둘러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돼지의 도살장면을 직접 본적이 없던 까닭에 가슴은 연신 쿵쾅거렸고 은근히 겁도 나는 바람에 멀찌감치 떨어진 산 쪽 길목 어귀쯤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좀 있었지만 높은 곳이라 돼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이병장이 의기양양 도끼를 든 채, 돼지와 마주섰다. 나는 돼지를 묶은 밧줄이 좀 느슨해 보여 지금이라도 꽉 동여매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지만 잡는 당사자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았겠나 싶어 잠자코 있었다. 아직도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가엾은 돼지는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에 놀라 쉼 없이 콧김을 내뿜으며 두 눈을 껌벅일 뿐이었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병장이 도끼를 들어 돼지 머리와의 거리를 얼추 재고 있을 무렵, 내 옆에서 줄곧 지켜보던 신상병도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지 “돼지는 본래 칼로 멱을 따서 잡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오늘 저 양반이 무슨 일 내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라고 급히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서너 번 겨냥을 마친 이병장은 거머쥔 도끼날을 높이 쳐들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돼지 미간을 향해 냅다 내리찍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꾸에에엑, 꾸에에에엑, 꾸에에에에엑.........”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대던 돼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용을 쓰기 시작했다. 순간 수돗간 지붕이 움찔하며 기둥이 맥없이 부러져 나가고 급기야 묶였던 밧줄이 풀리면서 눈에 핏발이 선 돼지가 산 쪽을 향해 무작정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코 위를 적시며 철철 흘렀지만 설맞은 게 분명했다. 이때였다. 꽤 떨어진 거리 때문에 나름대로 안심하고 섰던 나는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구르고 뒤로 넘어지며 화급히 비켜서자 어느 틈엔가 돼지가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드는 형국이 돼버렸다. 어쩌란 말인가? 너무 급한 나머지 모둠발로 내닫는 돼지와 나는 불과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아찔했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만 몸을 돌려 산 쪽을 향해 사력을 다해 뛸 수밖에 없었고 돼지 또한 맹렬한 속도로 나를 추격했다.
심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정통으로 받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돼지가 이렇게 빠를 수 있단 말인가를 생각하는 순간, 산길 옆 쓰레기 소각장 돌담이 얼핏 보였다. 무슨 힘이었을까? 한길이 넘는 담을 무협영화 주인공처럼 단숨에 타넘은 나는 쓰레기더미 속으로 사정없이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신상병이 소리치며 가까이 왔을 때까지 나는 혼이 나간 듯 어리쳐 꼼짝 하질 못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쫓고 쫓김이었다.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이 없는 돼지가 왜 하필 나를 택했겠는가.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와는 상관없이, 그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돼지가 오로지 살겠다는 본능으로 감행했던 저만의 필사적 탈출임이 분명했으리라.
이렇듯 돼지가 나를 쫓은 것이 아님이 분명할진대 옆으로 살짝 피해 길만 터주었더라도 산 쪽을 향해 뒤도 안보고 도망쳤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렇듯 당연한 이치마저도 상황이 모두 끝나고 주변사람들의 웃음 섞인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이란 말인가. 죽자 사자 돼지에 쫓겨 내뛰었던 당시의 내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창피스러웠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대의 속내를 꼭 집어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모두 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항상 정확히 읽어내며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남의 진정어린 선의(善意)를 끝끝내 오해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그르치고 있으며, 또한 나에 대한 남들의 적의(敵意)를 미처 깨닫지 못해 번번이 낭패를 본 적이 또 얼마나 자주 있단 말인가. 더욱이 이날 입때껏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의 구분은커녕 내 편과 네 편도 구별하지 못한 채, 매사를 흐리멍덩히 판단하고 맹추처럼 허둥댈 때면 답답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제대하기 전날 밤, 조촐한 내 환송회가 있었다. 내무반의 전통대로 가장 낮은 졸병 하나가 송별사를 했다. 그도 이번 사건으로 넘어져 아직 이마와 볼에 상처가 남아있는 귀여운 이등병이었다. 나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덕담으로 시작된 송별사는 몇 가지 일화를 섞어 재밌게 엮어갔는데 당연 이번 사건은 빠질 수가 없었다. 대개의 내무반원들이 얼굴과 팔다리에 상처를 입고 이제 겨우 딱지가 앉아 아물어갈 무렵인지라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터질 지경이어서 유쾌한 얘깃거리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송별사를 마친 그는 내게 작은 돼지저금통을 선물로 건네며 애교 있게 물었다. “조병장님! 돼지도 맹수(猛獸)인가요?” 짐짓 놀리려고 한 이 소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때 난 불현듯 ‘집돼지라도 덮어놓고 두려워한다면 당연히 맹수보다 더 무서울 수밖에 없고, 비록 사나운 멧돼지일망정 상대를 알고 제대로 대처만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맹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따라 크게 웃어재꼈다.
이제 그 일이 있은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닥쳐 당황스러울 때면 우선 그 일의 본질과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고 신중히 처신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저 놀라 아무 생각 없이 돼지에게 쫓겼던 그 때 그 일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정말 우연찮게 겪었던 웃지 못 할 사건하나가 내 인생의 고비마다 낭랑한 죽비소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큰 스승 한 분을 모시고 사는 듯 마음 든든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