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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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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원    
글쓴이 : 김형자    13-01-28 23:04    조회 : 3,983
사천 원
김형자
대학 초년생인 작은 아들의 낭비벽이 심각해서 몸살 중이다. 이집 저집 용돈을 비교해 봐도 넉넉한 액수인데 녀석의 지갑은 늘 비어 있다. 머리통이 이미 웃자라버린 녀석에게 고상한 충고나 길들이기 협상쯤은 코웃음거리에 불과하고 강경 대응을 하면할수록 과감하게 맞불을 놓는다. 대책 없는 녀석에게 따끔한 예방주사가 필요했다.
아파트 건너 할인마트 앞을 지나다가 시간제 알바를 구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계산원 모집, 주 5일, 교인 환영, 거주지 가까우신 분.’
계산원은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중형마트를 운영하는 사촌동생이 도와달라는데 경험 뿐 아니라 자신 또한 없어서 미뤄왔었다. 문득 녀석에게 근검절약의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살신입절(?)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이 정도라면 녀석의 자존심과 동정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나이 제한이라는 조건이 없어 희망은 보이는데 동동동 북소리가 들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아무리 다잡아 보아도 발길은 마트 앞을 지나쳐 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다시 되돌아 나와 계산대의 직원이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는 점에서 용기를 내어 접근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냥한 여주인은 왜소한 내 체격이 미덥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내일 나와 보세요” 했다. 1차 면접에선 통과한 셈이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는데 어제 보았던 여자 분들은 없고 다섯 명의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여려 보이지만 깡이 느껴지는 주인 남자가 무뚝뚝한 표정에 불만 가득한 눈길로 정육 코너 직원과 대화중이었다. 저런 표정이라면 고객들이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기까지 0.2초도 걸리지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그의 단점이 나에겐 득으로 작용해 줄 것 같은 예감이 스쳤다.
한가한 틈을 타서 주인에게 다가가 아부성 인사부터 했다. 그는 내 눈길을 피한 채 졸린 두꺼비처럼 두어 번 눈을 껌벅거렸는데 그 사이에 이미 내 관상을 읽어버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뜸을 들여가며 게으른 어투로 몇 가지 간단히 묻고 나서 말이 계산원이지 바쁠 때는 상황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한다고 덧붙였다. 그 말은 특정한 기준이나 영역이 없어 내겐 정나미 떨어지도록 가혹하게 들렸다. 어제, 여주인도 시급이 얼마인지 묻자 하는 만큼 줄 것이라고 했다. 애매한 반응에 혼란스러웠지만 돈 욕심보다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일이고 그들의 입장에서도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당연하다고 여겼다. 탈락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직원들이 하는 일을 눈여겨보니 콩나물의 무게를 달아 가격표를 붙이는 소소한 작업에서부터 각 코너를 돌며 꼼꼼히 체크하고, 운반하고 정리하기를 반복했다. 배달은 물론, 채소나 과일은 싱싱할 때 제 값을 받고 팔아야하기에 짬짬이 방송을 하고 호객 행위까지 곁들였다. 설마 저 일까지 내 몫은 아니려니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뇌리에 박혀 긴장의 주리를 틀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궂은 일을 눈치껏 찾아서 하다 보니 계산대는 나와 무관한 성역 지대다. 매장과 창고 사이를 줄달음치며 어떤 상품을 어디에 어떻게 배열해야하는지, 이벤트 상품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지, 가격표는 빠짐없이 표기되어 있는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안전하게 처리했는지, 주문해야할 품목은 무엇인지, 눌러 앉은 먼지는 없는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생소한 이름과 가격을 암기하는데 머릿속은 강정처럼 뒤범벅이다. 그래도 거기까진 좋았다.
출근 사흘 째, 어느 정도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숨 돌릴 여유를 느낄 찰라 채소와 과일은 당일 모두 판매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성격이 칼칼한 계산원은 멀대 같이 서있는 나에게 유치원 선생님처럼 시범을 보이면서 따라하라고 성화다. 고객을 붙들어 권유하거나 과일을 조각내어 시식하는 일이다. 완전 ‘시장 스타일’이다. 그뿐인가. 배달이 밀릴 때는 지체 없이 따라 나서야했다. 창피하다는 생각과 함께 때려치우고 싶은 냉랭한 유혹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저들의 속내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그렇지! 너의 한계는 거기까지야.’ 게다가 작은 녀석의 득의만만한 얼굴까지 등장하자 잠자던 오기가 벌떡 일어섰다. 이번에는 기필코 녀석의 구멍 난 호주머니를 단단히 꿰매 놓아야해.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는데 직원이 민망하리만치 없는 애교를 떨어도 비싸다고 외면하던 아저씨는 내가 건네는 뇌물 수박 한쪽 베어 물곤 배달을 시켰다. 천 냥 빚도 갚는다는 한 마디 말을 곁들이니 신기하게도 돌아서던 아주머니가 덜렁 지갑부터 꺼낸다. 어설픈 자신감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일주일 되던 날 주인이 계산대로 나를 불러들였다.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이 중추적 인물이며 곧 주인이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반면 사소한 실수에는 혹독한 비판이 뒤따랐다. 표정 관리, 맵시, 말씨는 미스코리아 선발전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아니다. 위장한 매너나 서비스 정신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식을 드러내기 마련이라서 금방 들키고 만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로부터 밀리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하는 생존 전략을 보면서 지구상에 하찮은 일이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이미 그들과 다름없는 최상의 대열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무렵 퇴근을 앞두고 있는 시각에 작은아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녀석의 출현에 멀뚱한 눈길로 바라보는데 언제나 전두 지휘하듯 당당했던 작은 애의 얼굴은 잔뜩 구겨지고 헝클어져 있었다. 녀석은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나가더니 봉투를 쥐어주었다. 쓰다 남은 용돈이었다.
“지금 알바 신청하고 왔어요. 용돈 안주셔도 되요. 얼른 집으로 가요.”
마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석고대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밝히는 녀석의 애교에 녹아 슬그머니 일손을 놓고 말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하루에도 한 두 번은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니 얼마나 반가운 반전인가.
한 달 간의 땀과 열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봉투를 열어보니 시급 사천 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2012년 고용노동청에서 적용하는 현행 최저 임금의 사천오백팔십원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할인마트에 가면 임금도 할인을 하나보다.
그러한들 내게는 고마운 할인마트다. 거품 가득한 녀석의 낭비벽을 할인해주고 곁들어 소통하는 선물까지 덤으로 주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알바 하러 집을 나서려던 녀석이 헤벌쭉 웃으며 놀린다.
“사천 원~, 사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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