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짖는 개를 돌아본다
“당신 뭐 드시고 싶어요?”
“응, 아무거나... 당신이 해 주는 대로 먹지.”
“세상에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어요. 좀 콕 찍어서 말 좀 해봐요.”
어릴 적, 이런 류의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아버지 편이었다. 왜 엄마는 편하게 해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보니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것은 때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바깥에서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무골호인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사람 좋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엄마는 악역을 맡아야했다. 결혼 후 4, 5년 동안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여인이 어떻게 해서 목소리 큰 여인으로 변했는지 나는 안다.
아버지의 인생철학은 부쟁이선승(不爭而善承)이었다.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도 무언지 참 좋은 말이라는 느낌이 와 닿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심강무성(深江無聲-깊은 강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이라는 말도 자주 썼다. 세모가 되면 연하장에 붓글씨로 이런 구절들을 써 지인들에게 보내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역사의 질곡 속에서 말간 얼굴도 일단 그 곳에만 가면 불만이 가득찬 탁한 얼굴로 변하는 정치판에 들어가셨다.
엄마는 세상에 나가는 아버지 등 뒤로 “개도 짖는 개를 돌아본대요.”라는 말을 하시곤 했다. 어린 나는 그건 좀 분명하게, 또박또박, 암팡지게 처신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하셨을까.
회상컨대 아버지는 때로 짖는 개가 될 때도 있었던 것도 같다. 생전 남의 말을 나쁘게 안하시던 분이 철새정치인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정치판을 보며 거친 표현을 쓰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셨으니까.
분명 부쟁이선승(不爭而善承)과 짖는 개 차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 살며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일견 짖는 개가 이긴 듯 했으나 안을 들여다보거나 길게 보면 부쟁이선승(不爭而善承)이 판정승을 했다. 아버지는 엄마 앞에서는 조용히 계셨지만 나가서는 결국 당신이 원하던 일을 다 하셨으니 말이다.
나는 매일 전화를 걸어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건 엄마의 표현이다) 우물쭈물 넘어가는 아버지와 사는 엄마를 응원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대충’이라는 말에 때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겨울이 춥다고 하면 더운 여름을 생각하라 하셨고, 여름의 더위를 탓하면 매서운 겨울바람을 생각하라 하셨다.
나는 혼돈의 세상에 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구체적인 생각은 않았지만 속으로 분명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엄마가 옳은 듯해도 나는 심정적으로 아버지 편이었다. 허허하고 웃으시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생활이란 걸 하면서 어느 덧 짖는 개가 되어버린 나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아버지가 답답해졌다. 엄마의 세월을 이해하면서 마음 한 편에는 그래도 무는 개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했다. 그래, 물지만 않으면 되지 뭐.
어찌 생각하면 아버지는 자신을 더 생각한 이기주의자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여 그로 인해 가족이 불편해져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자기기준과 내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그것이 진짜 이기주의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가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는 말이 혼돈스럽다.
감히 세상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인생을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나도 짖는 개, 아니 무는 개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아버지를 닮은 나는 부쟁이선승(不爭而善承) 쪽인 것 같다. 그럴 때는 내가 피학적인 것 같아 눈물도 나고 하지만... 아이들이 덥다고 불평을 하자 나도 모르게 한겨울을 생각하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경성사범을 나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하셨던 아버지는 학자가 되었으면 정말 훌륭한 교육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정치판에 나서지 않고 춘추시대의 공자처럼 훈수를 두는 위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긴 공자도 살아생전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세인들이 공자의 초췌한 모습이 상가지구(喪家之狗)와 같다고 했는데도 공자는 웃기만 했으니 정말 큰 그릇이었다. 오랫동안 떠돌아다녔고, 정치적으로 자기의 뜻을 펼치지 못한 공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볼품없고 처량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기 3년 전 곡부의 공자묘에 다녀오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버지가 그 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물을 수 없어 안타깝다. 흠모하던 상갓집 개의 묘에서 평생을 짖는 개로 살지 않은 자신에게 ‘잘 살았다’ 칭찬하셨을까.
짖는 개와 부쟁이선승(不爭而善承) 사이의 나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엄마와 아버지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글을 쓰며 속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분명 짖는 개라 했다. 엄마도 알고 있었을까.
엄마도 무는 개는 되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겠다.